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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예
봄바람에 실린 그녀의 샴푸 냄새에 ‘딸바보’ 유부남의 심장이 가당찮게 뛴다
▶ 유부남이 되면 안정을 찾는다는데, 이상하게도 더 바빠졌습니다. 일이 많아지고, 술자리도 잦아졌습니다. 허옇게 뜬 얼굴로 집에 돌아오면 아내가 반기고, 20개월 된 딸이 “아빠!”를 외치며 쪼르르 달려와 안깁니다. 웃음이 나옵니다. 그러곤 ‘이게 행복한 삶이지’라고 자조합니다. 하지만 잠들기 전 가끔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앞으로 내 삶에 또다른 사랑은 없는 걸까. 혹시 이런 질문을 해보는 것조차 잘못일까요.
서른셋, 유부남, 애아빠, 회사원. 날 설명할 수 있는 단어들이다. 종합해보면 그냥 평범한 한국의 아저씨. 좀더 부연해보면 ‘아직’ 아내를 사랑하고, 딸바보보다는 ‘딸병신’ 수준의 아빠이고, 회사에서는 월급의 일부는 욕을 먹으며 받는다고 믿는 회사원.
매일 아침 급히 달려 나가 버스를 타고, 지하철로 갈아타 회사에 간다. 출근시간은 늘 졸리다. 졸음을 참을 만하면 지하철 안에선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본다. 못 버틸 정도로 피곤하면 선잠이 든다. 그런데 두달 전부터 재밌는 일이 생겼다. 같은 시간의 지하철에서, 같은 회사에 다니는 아가씨를 매일같이 보는 일인데, 역에서 내려 회사 정문으로 들어서는 순간까지 쭈욱 같이 걷는다. 같이 걷는다고 해서 얘기를 나누거나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냥 비슷한 속도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사까지 걸어간다. 물론, 처음부터 의도한 건 아니었다. 그냥 비슷한 시간대에 예쁜 아가씨가 타는구나 생각을 했고, 또 시간이 지나고 나서 같은 회사를 다닌다는 걸 알게 됐다.
갈색으로 염색한 긴 생머리, 제법 큰 키, 어딘가를 누르면 ‘새침’이라는 소리가 나올 것 같은 도도한 외모. 굽이 없는 구두로 사뿐사뿐 걷는 그녀를 아침마다 보는 게 좋았다. 만성피로에 시달려 축 처져 있더라도, 지하철에서 그녀를 발견하면 이상하게 힘이 났다. 그녀와의 만남은 남자들만 득실거리는 회사생활 속 소소한 이벤트처럼 느껴졌다. 속도를 맞춰 걷는 나의 행동이 혹시나 부담스러울까 싶어 두세 걸음 앞서 걸어본 적도 있다. 그녀 역시 속도를 늦추지 않고 일정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뒤따라왔다. 그날 이후 매일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앞서거니 뒤서거니 회사까지 걷고 있다. 그냥 그뿐이다. 이 정도로 좋았다. 얘기를 하거나 마주 보지 못하는 게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이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난 유부남이니깐. 같은 시간에 지하철을 타고
함께 역에서 회사까지 걷는다
인사도 없고, 대화도 없다
그뿐이다, 그 정도로도 좋다
그녀를 보면 그냥 힘이 난다
오늘은 나란히 걸어 출근하며
말을 건네는 상상을 해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
부끄럽지만 봄이 갈 때까지라도
이 감정 느끼고 싶은데 안될까?
며칠 전에는 지하철역 밖으로 나가는 에스컬레이터에 탔더니, 그녀가 바로 내 앞에 있었다. 지하철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은은한 샴푸 냄새가 났다. 그녀가 역 밖으로 걸어나와 회사 쪽으로 걷기 위해 돌아서는 순간 나와 아주 잠깐 눈이 마주쳤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나란 사람을 알까, 궁금했다. 그날도 회사까지 걷는 5분 동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사무실에 출근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켰다. 눈은 모니터를 향했지만, 마음은 그녀를 향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이 감정, 나는 설레고 있었다. 하지만 이내 부끄러워졌다. 이 나이를 먹고 이렇게 설렌다는 게, 그리고 유부남인 내가 이런 감정을 느낀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친한 친구는 내 이런 근황을 듣고 “너는 봄만 오면 꼭 그러더라”라고 핀잔을 줬다. “내가 언제 그랬냐”고 반문을 하자, “너 대학 다닐 때도 맨날 그랬어. 봄바람에 녹는 건 여자 마음 아니냐? 이 기집애 같은 놈아”라고 말한다. 그러고 나서 친구는 날 위로했다. “야, 사람 마음이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누구 좋아하고, 사랑하고, 싫어하고, 미워하고. 너 회사에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 엄청 많지? 좋아하는 사람보다 더 많지? 그럼 회사에 좋아하는 사람 한명 정도 더 생겼다고 생각하면 편하잖아. 그 아가씨한테 말 붙여 볼 거야? 못하잖아. 그럴 용기 없잖아. 넌 변한 게 하나 없다니깐. 수업시간에 그렇게 마음 졸이며 좋아했던 여자애한테 결국 병신같이 아무 말도 못했잖아. 지금은 그게 가당키나 하냐, 너 유부남이잖아. 그러니깐 편하게 생각해. 아무리 나쁘게 쳐줘도 누굴 좋아하는 마음은 나쁜 게 아니라니깐.” 친구의 말을 듣자 마음이 편해졌지만 조금 우울했다. “그게 그거랑 같아?”라고 내가 묻자, 친구는 “그냥 같다고 생각해라. 이 쪼다야”라고 답했다. 몇 년 전 금요일 밤, 티브이 토크쇼에서 ‘출근길 로맨스’를 다루는 것을 아내와 함께 본 적이 있다. 이십대 후반의 여성이 매일 아침 정류장에서부터 버스를 같이 타고, 지하철로 함께 갈아타 비슷한 곳으로 출근하는 남성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둘은 서로 대화만 나누지 않았을 뿐, 서로가 서로의 시선에 머물며 매일 아침 함께 출근한다고 했다. 나는 함께 티브이를 보던 아내에게 물었다. “저런 상황이 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아내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내게 말했다. “굳이 싫은 사람이 아니라면 시선을 피하지 않을 것 같은데. 오빠는 저런 상황이면 어떨 것 같은데?” 나는 그때 그렇게 대답했다. “글쎄, 생각을 안 해봐서 잘 모르지만 재미는 있겠네. 근데 저런 일이 나에게 생겨도 되나?” 내 대답을 들은 아내가 눈을 흘기며 옆구리를 찔렀다. “당연히 그런 일이 생기면 안 되지!” 어제는 조금 용기를 내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이래도 괜찮을까, 그녀가 싫어하진 않을까,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었나, 마음속에서 수많은 질문을 했다. ‘안녕하세요’라고 조용히 말을 건네면 나를 돌아봐 줄 거리에 그녀가 있다. 잠시 눈을 감고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해봤다. 상상 속의 나는 그녀에게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에요’라고 인사를 했고, 그녀가 웃으며 ‘네, 좋은 아침이네요’라고 답례했다. 눈을 떠보니 그녀는 이미 나보다 두세 걸음 앞서서 걷고 있었다. 내일이면 또 같은 시간에 일어나 출근을 해야 한다. 일찍 일어나 몽롱하게 잠에 취해 스마트폰 알람을 끌 것이고 간단히 스트레칭을 하고선 샤워를 할 것이다. 옷을 부리나케 입고 버스에 눅진한 몸을 싣고 지하철로 향할 것이다. 그때부터 부끄러운 마음과 함께 심장이 천천히 두근거리겠지. 잠깐이라도, 봄이 오고 갈 때까지만이라도 이 감정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 지나쳐 사라지기를. 소년처럼 웃고 싶은 서른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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