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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애
장기연애의 끝
▶ 오래전 극장에서 <조제,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라는 영화를 보고 난 후, 그녀는 영화 속 연인들의 이야기에 펑펑 울었습니다. 눈물의 이유는, 영화 속 그들의 시작은 뭔가 특별해 보였는데 헤어짐은 너무 평범하고 초라해 보였다는 것이었죠. 그때 우리는 저들과 다를 것이고, 훨씬 더 특별하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두서없이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많은 언약을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을 견뎌내고, 함께했는데 이제 마지막이 찾아온 것 같습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헤어지고 집에 돌아온 밤, 컴퓨터 앞에 앉아 우리의 사진을 하나씩 꺼내 보았다. 풋풋했던 우리의 대학생 시절부터 지금까지 추억이 너무 많았다. 바삐 사느라고 기억도 못 한 이야기들을 책상 위에 꺼내놓고 보니 먼지처럼 추억들이 내 방을 떠돌았고 자그마치 7년이란 시간이 흘러간 흔적은 평생의 궤적처럼 느껴졌다. 그런 시간이 소멸될 수도 있다니. 그 많던 시간이 어디로 날아가버린다는 공포가 마음 한구석으로 밀려들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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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텔.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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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심 불안해하던 여자친구
주말에 만나면 조급한 모습
사랑 갈구하던 무언의 시위
선을 보겠다는데도 심드렁
‘모텔 그만 가고 함께 살자’
제안에도 침묵해 버린 나
지겨워졌을 뿐, 지쳤을 뿐
예전에는 대학 수업을 마치고 별일 없으면 서울 어디에선가 만나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데이트를 했다. 누구 한 명이 바쁘면 잠깐이라도 얼굴을 봤다. 그때는 서로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당장 달려갈 수 있다는 마음 비슷한 것이 있었는지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서로가 지내는 곳이 멀어지게 된 이후로 주말에 만나면 뭔가 조급해졌다. 여자친구의 행동은 더 많이 사랑해달라는 무언의 시위처럼 느껴졌고 나는 받아줄 법한데도 불구하고 예전 같지 않던 여자친구의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주말 내내 같이 있어도 여자친구는 만족해하지 않았다. 그녀도 역시 지금 상황이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느꼈기에 ‘대학생 시절에는 각자 일이 바빠 한 주 내내 만나지 않아도 초조해하지 않았는데’라고 말하며 속상해했다. 그 와중에 나는 곯아갔다. 주말에 기운 닿는 대로 여자친구의 기분을 맞춰 주고 다시 평일로 돌아왔을 때, 회사는 생각보다 늘 어려웠다. 지랄맞은 선임을 만난 것은 둘째 치더라도 예상하기 힘든 일이 많았다. 회식은 갑작스럽게 잡혔고, ‘술을 절대 권하지 않는다’고 말했던 사람들은 당신들의 속도에 맞춰 술을 먹길 바랐다. 아침에 없던 일이 퇴근할 때 던져졌고 선임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내일 아침에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매일 조금씩 쪼그라들어가며 몸도 마음도 난쟁이로 변해갔다. 균열이 시작된 우리 관계에 파열음이 크게 난 건 장거리 연애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토요일 데이트였다. 저녁을 먹고 난 뒤 커피를 홀짝이던 여자친구가 뜬금없이 내게 말했다. “둘째 이모가 선 한번 보라고 하더라. 교회 권사님 아들이 변호사인데 선생님 직업 가진 여자를 찾는대. 너는 예쁘니깐 그 집에서 좋아할 게 분명하다느니 어쩌느니. 그 집에 돈도 많은 것 같은데 말만 하면 언제든지 자리 만들어준대.” 이상하게도 그 얘기를 들었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옛날 같으면 열 내면서 큰소리를 냈을 것 같은데, 그녀가 정말 남들 눈에 예뻐 보이나 따위의 말도 안 되는 딴생각을 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한번 나가 봐. 나가면 시장에서 니가 얼마나 먹히는지 알아볼 수도 있고.” 내 대답을 듣자 오히려 여자친구가 정색했다. “오빠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해? 너네 이모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냐고 나한테 화내야 되는 것 아냐?” 그렇다. 사랑의 확인을 해줌으로써 안도를 시켰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그 말을 듣고 난 뒤 내 생각은 완전히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지금 이 상황은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 많이 보는 대화 패턴인데.’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맴돌자 상황이 내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고 정말 그녀에게 남처럼 이야기했다. “이런 얘기는 애초에 니가 나한테 꺼내지 말아야지. 당연히 거절해야 되는 얘기를 뭐하러 나한테 꺼내?” 여자친구는 “당연히 거절했어!”라며 화를 냈다. 그 말에 대한 내 대답은 걸작이었다. “그래, 잘했네.” 우리가 헤어진 건 온전히 나의 탓이었다. 어느 늦은 밤 모텔을 나와 집까지 바래다주는데 여자친구가 살짝 투정을 부렸다. “돈도 아깝고, 이제 이런 데 가지 않으면 좋겠다. 같이 살면 돈도 아끼고 밤마다 같이 있을 수 있는데.”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오빠는 나랑 같이 살고 싶지 않아? 예전에는 취직만 하면 같이 살자고 노래를 부르더니.” 그 말에 나는 비겁하게 뒷걸음질쳤다. “지금처럼 지내는 것도 좋은데 뭘.” 집 앞에 온 그녀는 나를 보며 담담하게 말했다. “오빠는 이제 나랑 결혼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 그렇지?” 그 말에 나는 침묵하고야 말았다. 돌이켜보면 언젠가부터 우리는 심심치 않게 결혼에 대한 얘기를 하며 미래를 공유했다. 결혼 뒤 여름휴가는 어디로 갈지, 집은 어떻게 꾸밀지부터 사소하게는 텔레비전 크기까지. 생각지도 못한 사이 그녀와 나는 변해버린 나를 목격했다. 변한 이유는 아주 보잘것없었다. 이 관계에 대해 지겨워지고 지친 그것뿐. 몇 년 동안 해온 지루한 패턴의 데이트, 더 이상 심장을 두근거리게 만들지 못하는 스킨십. 멀어진 만큼 더 가까이 있어야 하다는 강박. 결국 그녀는 도망갈 준비만 하는 나를 견뎌내지 못했고, 우리가 그렸던 미래는 조금씩 지워졌다. 그리고 둘 다 같은 시점에 느꼈다. 장기간 연애를 한 연인에게 결혼이라는 목표가 사라지면 남는 것은 이별뿐이라는 걸. 헤어지던 날, 그녀는 눈시울을 붉히며 담담하게 말했다. “우리라고 정말 특별한 거 하나 없네. 이렇게 헤어질 수도 있구나.” 그녀의 말에 내 마음도 찢어졌다. 이대로 떨어지면 나는 잘 살 수 있기는 할까. 정말 답이 안 나왔다. 사랑에 지친 비겁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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