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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연애
설렘이냐 우정이냐
▶ 요즘 화두는 단연 ‘의리’입니다. ‘의리’ 외길 인생을 걸어온 김보성씨는 각종 프로그램과 시에프(CF)를 섭렵했습니다. 두 팔을 휘두르며 ‘의리’라고 외치는 모습은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존경스럽기도 합니다. 의리를 지키고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기 설렘과 우정을 저울질했던 한 남자가 있습니다. 설렘을 택했던 그가 친구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저기 짧은 치마 입은 여자 어때?” ㅊ은 어김없이 지나가는 여자들의 점수를 매겼다. 키 크고 얼굴도 잘생긴 ㅊ은 내 대학 절친이다. 수업을 마치고 피시방으로 가는 길에 친구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그의 시선은 뽀얀 피부에 단발머리를 한 여인을 향하고 있었다. 노란 원피스 위에 까만 가죽재킷을 걸친 그녀는 청순하면서 도발적인 매력을 풍겼다. 친구는 피시방은 나중에 가자며 내 손을 잡아끌고 그녀의 뒤를 밟았다.
그녀는 경영대로 들어갔고 나와 친구도 놓칠세라 뛰어들어갔다. 나는 피시방에 가고 싶었지만, 지금껏 보지 못한 애절한 눈빛의 친구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녀의 바로 뒷자리에 자리잡은 나와 친구는 인맥을 총동원해 그녀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 수업이 끝날 때쯤, 우리는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경영대에 다니는 친구에게 부탁해 그녀와의 술자리 약속을 잡았다.
청순하고 도발적인 그녀에게 친구가 마음을 빼앗겼다
친구 위해 술자릴 만들었지만
그녀는 나에게 호감을 표했다
결국 여자친구와도 헤어진 채
몰래 그녀와 사귀는 사이로 발전
친구는 주먹 휘두르더니 연락 끊고
남남이 되었다가 2년 만에 만나…
드디어 결전의 날. 평소 짠돌이로 소문난 ㅊ의 지갑은 그날따라 두둑했다. 나와 ㅊ, 그리고 그녀를 불러준 경영대 친구까지 셋은 학교 후문 술집에서 그녀 일행을 기다렸다.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치밀한 작전을 계획하고 있는 긴박한 순간 그녀와 친구들이 들어왔다. ㅊ을 제외한 사람들은 공짜 술에 신이 났고, 나는 이 짠돌이 친구가 쏜다는 사실에 두 배로 신이 났다. 술자리는 화기애애했고, 친구와 그녀는 이야기가 잘 통하는 듯이 보였다. 나와 경영대 친구는 ㅊ과 그녀에게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만들어주려 했다. 그녀와 함께 온 친구들은 눈치가 없는 건지, 공짜 술에 눈이 먼 건지 집에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다 함께 노래주점으로 향했고 ㅊ은 지갑이 얇아지는 만큼 얼굴도 핼쑥해져 갔다. 전날 마신 술로 두통에 시달리는 오후, 문자 한 통이 왔다. “오빠 안녕하세요. 어제는 잘 들어가셨어요?” ㅊ이 마음에 들어한 그녀였다.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지만 친절하게 답장을 보냈다. “응. 너도 잘 들어갔어?” 이후로 그녀는 종종 연락을 해왔고 난 기계적으로 답장을 보내줬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건 그로부터 며칠이 더 지나서다. ㅊ과 맥주를 마시던 도중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그런데 ㅊ은 그녀가 몇 시간째 연락이 없다며 투덜거리는 것이었다. 그제야 나는 일이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걸 느꼈다. 사실 나에게는 6개월 넘게 사귄 여자친구가 있었다. 그날 술자리에서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기에 밝히지 않았지만 숨길 생각은 없었다. 일이 커지기 전에 마무리하기 위해 그녀를 불렀다. 그녀는 바쁘다며 계속 만남을 거부했다. 답답해진 나는 ‘여자친구가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 문자 이후 그녀는 연락이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내 친구에게도 연락을 끊었다. 슬픔에 빠진 친구에게 소개팅을 제안했지만, 한숨만 쉴 뿐 대답이 없었다. 한달이 지났고 친구는 여전히 지나가는 여자를 보며 점수를 매겼다. 그녀에 대한 마음은 버리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던 중 그녀에게서 문자가 왔다. “오빠 잘 지내시죠?” 문자를 보는 순간 친구의 슬픈 얼굴이 떠올랐다. 그녀는 할 말이 있다며 만나자고 했다. 인천행 기차를 탔다. 인천시청역으로 마중 나온 그녀는 영화 표 2장을 들고 서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간 술집에서 연거푸 소주를 마시던 그녀는 수줍은 얼굴로 내게 고백했다. “오빠 좋아해요.” 발그레한 그녀의 볼은 어두운 조명 아래서 더 붉게 보였다. 한동안 나는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이 되고 나니 현기증이 몰려왔다. 여자친구와 친구의 얼굴이 번갈아 떠올랐다. 결국,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여자친구와 통화를 했지만 머릿속에는 좋아한다고 고백하던 그녀의 뽀얀 얼굴이 맴돌았다. 그날 이후 그녀와 가끔씩 만났고 그녀와 가까워지는 만큼 여자친구와는 멀어져갔다. 청순하면서도 도발적인, 종잡을 수 없는 그녀의 매력에 빠진 나는 결국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그녀와 연인이 됐다. 친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많은 고민을 했지만 알리지 않기로 했다. 재채기와 사랑은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비밀리에 만났지만 결국 친구에게도 소식이 전해졌다. 초반엔 친구들의 눈을 피해 학교 밖에서 만났지만 점점 대범해져 교내에서 손잡고 다닌 것이 화근이었다. 친구는 나를 불러내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나도 옆에서 말없이 담배만 태웠다. 줄담배를 피워대던 친구는 주먹으로 내 얼굴을 때렸고, 난 가만히 맞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절친이었던 ㅊ은 핸드폰 번호를 바꾸고 휴학을 했다. 나는 친구를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와 헤어졌다. 다음 학기에 ㅊ은 복학했지만 나를 철저하게 피했다. 이후 한번도 얼굴을 마주치지 못했고 ㅊ의 소식은 친구들을 통해서만 들었다. 그렇게 2년이라는 시간이 지났고, 그 시간은 절친했던 우리를 남남으로 만들어 놓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날, 친구들과 술자리를 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문득 ㅊ이 생각났다. 친구를 통해 ㅊ의 연락처를 알아낸 나는 용기 내 연락했다. 우린 그녀와의 추억이 서린 그 술집에서 2년 만에 다시 만났다. 서먹할 줄 알았지만 다행히 ㅊ은 이미 날 용서했다고 했다. “그래도 친구 아이가.” ㅊ의 이 한마디에 남남같이 지냈던 지난 2년이 미안해졌다. 만약 나와 친구의 상황이 바뀌었어도 나 역시 친구를 용서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젊은 날 뜨겁게 끓어오르는 욕정은 우리가 어찌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었음을 아니까. ㅊ과 나는 여전히 제일 친한 친구다. 다시는 설렘에 흔들리지 않을 29살 제천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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