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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25 18:47 수정 : 2014.07.26 10:40

[토요판] 연애
유령의 만남

▶ 사랑과 연애, 사랑과 결혼이 늘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대의 조건으로 성사된 결혼, 외로움을 덜어내기 위한 연애도 있습니다. 짝사랑하던 여자를 떠나보내고 아픔을 잊기 위해 연애를 시작한 남성이 있습니다. 그녀와 입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눠도 사랑은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허탈해하며 이별을 맞이합니다. 아, 사랑이란 이런 것이구나! 우린 늘 인생을, 진리를 뒤늦게 깨닫는 모순투성이 바보들이지요.

“나를 왜 만나는지 모르겠어. 우리 좀 쉬자.”

그녀는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매사에 심드렁한 내게 단단히 자존심이 상해 있었다. 3주쯤 있다가 연락해도 되냐고 물으니 어이없는 눈빛이 대답 대신 돌아왔다. 그녀는 내가 끝까지 매달려 주길 바랐고, 나의 매달림에는 사실 진심이 없었다. 이별의 이유를 짐작했기에 굳이 자세하게 물을 필요도 없었다. 커피숍을 나오면서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네가 자존심 상해하지 않았으면 해. 정말 미안하다.” 그녀와 나의 마지막이었다.

그녀를 만나는 석 달 동안 나는 꽤 성실한 남자였다. 문제는 성실하기만 했다는 사실이다. 데이트 코스를 잡거나, 생일을 챙겨 주거나, 집에 데려다 주거나 하는 매너쯤은 지켰지만 그게 전부였다. 나는 그녀에 대해 아는 게 많지 않은 유령 같은 남자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아무리 들어도 돌아서면 잊었다. 어느 날, 그녀가 얘기했던 친구 이름을 틀렸고 또 다른 날은 다른 사람이 한 이야기와 그녀와 나눈 대화를 헷갈려 했다. 처음엔 화를 내다가도 그녀는 점차 포기해 갔다. 만날 때마다 말수가 줄었다. 헤어지던 날 우리는 정말 최악의 영화를 보았고 말 한마디 없이 밥을 먹다가 커피숍에서 헤어졌다.

죽도록 짝사랑했던 여자가
떠난 뒤 방황하다 만난 그녀
충동적 키스와 사귀자는 고백
사랑은 노력으로 되지 않더라

외로움을 달래려는 목적과
약간의 진심 사이 그 어디쯤
그녀를 만나면서도 떠난
여자와 연락 끊지 않았으니

그녀는 내게 연인이라기보다 그저 ‘만나는 사람’이었다. 외로워서, 몰두할 관계가 절실히 필요해서 그녀를 만났다는 변명이 어느 정도 맞을 것 같다. 죽도록 짝사랑했던 여자가 외국 연수를 떠나고 몇 달 뒤 방황하던 시절에 그녀를 소개받았다. 당시 나는 매일 술이었다. 외국으로 떠난 그 여자의 사진, 주고받은 메시지, 기억나게 할 만한 건 모두 없앴지만 그리움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몇 달을 술로 헤맬 때 그녀를 만난 것이다.

소개받은 그녀를 몇 번인가 만나던 그해 겨울밤, 맥주를 마시며 산책길을 걸었다. 함께 길을 걷다 대뜸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선 사귀자고 말했다. 그날, 그녀가 예뻐 보였던 것도 같다. “오늘 사귄 지 1일로 하자.” 그녀는 나를 보며 활짝 웃었고 나 역시 사랑을 얻었다는 안락함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녀는 날 위해 노력하는 착한 여자였다. 지인들과의 단체 카톡방에서 늘 말이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 연락 한번 먼저 하지 않는 내성적인 그녀가, 내 앞에서는 자기 가족 이야기도 잘 털어놓았다.

내 마음은 연극 같은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녀와의 입맞춤과 사귀자는 고백은 꽤 충동적이었다. 사랑은 또 다른 사랑으로 잊혀진다는 노랫말을 주문처럼 되뇌며, 만나다 보면 좋아하게 될 거라는 주위 사람들의 조언을 신앙처럼 믿었다. 그렇게 새로 만난 그녀를 좋아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사랑은 노력이 아니라 한순간에 찾아오는 마법이라는 걸 그때야 깨달았다.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도 결핍은 채워지지 않았고 떠난 여자에 대한 그리움만 짙어졌다.

짝사랑했던 여자가 떠오를 때마다 그녀에게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데이트 약속을 잡아 보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와 전화를 끊고 나면 허탈한 가슴속에 사랑했던 여자가 자꾸 드나들었다. 죄책감도 들었다. 약간의 도구적 목적으로 그녀를 만난다는 감정을 부인하기도 어렵거니와 사람을 그렇게 대하는 게 아니라는 미안함도 떨쳐낼 수 없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그녀를 만나면서도 외국으로 떠난 여자와의 연락을 끊지 않았다. 외국에서 걸려온 그 여자의 전화를 받을 때마다 그녀에게서 느낄 수 없는 설렘과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꼈다. 사실 내가 좋아하는 건 외국으로 떠난 그 여자라고, 내가 정착할 수 있게 좀 도와 달라는 말이 수없이 목구멍까지 솟구쳤지만 끝내 하진 않았다. 내 연애는 외로움을 달래려는 목적과 약간의 진심, 그 어디쯤에 있었다.

그녀와 헤어지고 나는 또 허기를 채우려 몇 명의 여자들을 만났다. 같이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연락을 주고받았지만 마음은 다 주지 않았다. 다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녀처럼 정식으로 사귄 관계는 아니고 ‘썸’만 탔다는 것이다. 헤어지면 얼마간의 상처야 주고받겠지만 적어도 정식 연인 관계에서 감수해야 했던 고통보다는 가벼운 감정들이었다. 나쁜 남자? 글쎄, 그녀와 나눈 포옹과 입맞춤, 이야기들이 모두 결핍을 채우려는 방법에 불과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 순간들 어디쯤에서 그녀가 아름다워 보이기도 했고, 계속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변명을 하자면, 외국으로 떠나버린 여자에게서 나 또한 상처를 받았는데 나도 이 정도 상처쯤 주는 게 뭐 어떠냐 싶었다. 짝사랑 그녀도 외로울 때면 많은 남자들을 만났으며 사랑하지 않은 나에게도 자주 연락하며 유혹 아닌 유혹을 했다. 소리 내 웃을 때마다 길게 처지는 눈이 예뻤던 그 여자는 결국 내 고백을 보기 좋게 거절한 뒤 외국으로 떠났다.

언젠가 정신을 차려보니, 사랑했던 여자에게서 입은 생채기는 말끔히 아물어 있었다. 마음만은 다 주지 않았던 그녀와의 관계도 ‘썸’에서 차라리 그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는 후회가 든다. 적어도 그녀의 상처를 조금은 줄일 수 있었을 테니까. 정식 연인은 아니지만 그 직전의, 비슷한 긴장감만 흐르는 남녀 사이. 사귈 때 주어지는 책임이나 상처에서 자유롭지만 혼자 감당해야 할 외로움에선 벗어날 수 있는 관계. 주변에는 이런 관계를 길게 가져가며 즐기는 친구들이 꽤 있다. 데이트 비용에 대한 경제적 부담, 혹은 관계에 대한 책임을 최대한 줄이려는 세태가 연애 감정에도 녹아 있는 것 같다. 진짜 연애가 언제 시작될지 알 수 없지만 사람은 늘 외롭지 않은가. 그래서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 우리는 결핍을 메꿀 이성을 찾는다.

그녀에게 미안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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