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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04 19:52 수정 : 2014.12.03 11:23

[토요판] 연애 / 나쁜 여자의 고백

▶ 오랫동안 둘도 없는 친구로 지내던 남녀가 갑작스럽게 사랑에 빠진다. 로맨틱 코미디에 자주 등장하는 설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드라마같이 잘 풀리지 않습니다. 7년 동안 친구로 지낸 남자와 사귀었다가 나쁜 여자가 된 사람이 여기 있습니다. 키스까지 먼저 해가며 아무리 노력해도 남자로 느껴지지 않았다네요. 사랑과 우정 사이. 참 어렵습니다.

내게 고백했다 차인 남자를 다시 만났다. 그는 7년 전 내게 고백을 한 적이 있다. 그는 같은 학과 동기였고 학교에서 소문난 ‘개그맨’이었다. 하는 말마다 여자들을 웃기지 않는 일이 없었다. 내가 떠올리는 그의 이미지는 ‘웃긴 친구’였다. 진지함보다는 농담이 더 어울리는 ‘시시한’ 친구 말이다. 그와 친해지게 된 것은 같은 영어 동아리에 들게 되면서다. 같은 학과 친구라는 동질감에 서로 친해졌다. “띠링.” 어느 날부터 그는 별 용건도 없으면서 불쑥 내게 문자메시지를 보내왔다. ‘과제는 다 했냐’, ‘방바닥에 누워서 뒹굴거리고 있는 거 다 안다’, ‘토익 치고 나왔는데 아직도 전날 마신 술이 덜 깼다’는 둥 시답잖은 문자들 말이다. 그의 유머가 싫지 않았다. 나 역시 “ㅋㅋ 정신을 놨구나. 술 좀 그만 마셔”라는 답을 보냈다. 누가 봐도 우리는 서로 티격태격하는 친구 사이였다.

머지않아 그의 고백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단칼에 거절했다. ‘친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말이다. 나는 그에게 단 한번도 연애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이 나를 이성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했다. “미안. 친구로 지내자.” 거절당한 뒤 그는 한밤중에 술에 잔뜩 취한 채 전화를 걸었다. 나는 매몰차게 전화를 끊었다. 이후 동아리방에서 수척해진 그의 얼굴을 봤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다행일까. 수개월이 지나 나는 남자친구가 생겼고, 그 역시 여자친구를 사귀게 됐다. 자연스럽게 우리 둘 사이의 일은 ‘과거’로 묻혔고, 그제야 ‘쿨하게’ 인사도 하며 지낼 수 있게 됐다. 미니홈피에 들어가 서로의 커플 사진에 댓글을 다는 여유도 생겼다. 다시 예전으로 돌아간 것이다.

학교에서 소문난 ‘개그맨’인
그의 고백 매몰차게 거절
친구로 쿨하게 지내다가
크리스마스이브 함께 보냈으니

‘남자로서 괜찮다’는 평가는
결코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다시 친구로” 제안에 그는 잠수
내 여동생마저 날 비난했다

2년 동안 우리는 다시 친구로 지냈다. 수업을 함께 듣고, 동아리에서도 자연스럽게 함께 공부했다. 서로에겐 서로의 짝이 있었으니까. 내 남자친구는 ‘나쁜 남자’에 속했다. 그는 술자리에 있거나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느라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연락도 뜸했다. 나를 기다리게 만들었다. 외로웠다. 결국 헤어지자고 했다. 나는 남자친구와 헤어진 뒤, 몇 개월 동안 혼자 지내며 솔로 생활을 만끽했지만 외로움의 관성은 컸다. 자연히 친구와의 문자메시지는 늘었다. 시답잖은 문자를 주고받으며 킥킥댔고, 만나서 맥주를 함께 마셨다. 그도 마침 여자친구와 얼마 전 헤어졌다고 했다.

그와 크리스마스이브를 함께 보냈다. “이브날 솔로끼리 술이나 마시자”는 ‘자폭’ 술자리에 나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건 친구끼리의 우정파티, 뭐 그런 거였다. 우리는 술집에서 동아리, 해외 봉사활동, 전공 이야기로 꽃을 피웠고, 그러다 보니 밤이 깊어갔다. ‘연인이 만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이성친구와 만난다는 것의 미묘함.’ 우리는 그 미묘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장난과 농담이 오가던 테이블은 때때로 조용해졌다. 말이 사라진 순간, 허공에서 부딪히는 서로의 시선에 어색함이 감돌았다. 술집에서 나와 연인이 점령한 거리를 걸었다. 그가 남자친구라면 어떨까? 나는 어느새 예전 남자친구와 그를 비교하고 있었다. 그는 적어도 나를 외롭게 만들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그를 떠보는 문자를 보냈다. 연인과 친구 사이를 넘나드는 이야기 말이다. 패션 이야기로 수다를 떨 때면 “너 정도면 괜찮지”라는 말을 툭 던졌고 영어를 잘하는 그에게 “난 영어 잘하는 사람 보면 멋지더라” 하고 말했다. ‘여우짓’의 목적은 그에게 사귈 마음이 있다는 점을 넌지시 전하는 것이었다. 그도 반응했다. 버스를 타고 우리 동네까지 왔고, 함께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날이 늘었다. 우린 사귀기로 됐다. 사실 그를 좋아한다는 확신은 없었다. 분명한 건 그를 ‘남자친구로서 나쁘지 않은 상대’라고 여긴다는 점이었다. 나쁘지 않으니까 사귈 수 있고, 그러다 보면 좋아지는 것 아닌가?

내 판단은 얼마 못 가 깨졌다. 그는 ‘나쁘지 않은 상대’, 그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내 마음은 ‘친구’에서 단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했다. 당황스러웠다. 외로움은 사라졌는데 감정은 충만해지지 않았다. 설렘이 없었다. 그는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은 것 같다며 기뻐했다. 이미 남자친구로서 행동하고 있는 그를 보며 난 골머리를 앓았다. 섹스어필이 안 되어서일까. 내가 먼저 키스를 했다. 그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부딪쳤다. ‘제발, 느낌아 와라.’

맙소사. 그 뻣뻣함, 건조함이라니. 어떤 ‘필’(feel)도 생기지 않았다. 얼굴까지 새빨개진 그의 마음과 나의 절망감은 하늘과 땅처럼 멀었을 것이다. 그가 내 손을 잡고선 “손이 하얘서 예쁘다”고 말할 때, 난 친동생의 손을 잡는 것처럼 심드렁했다. 슬쩍 손을 빼고 걷기도 했다. 그와 데이트할 때면, 소개팅에서 마음에 없는 사람과 있을 때처럼 불편했다. 사연을 들은 내 친구들은 내게 ‘미친년’이니 ‘나쁜 년’이니 욕을 해댔다. “좋아하지 않으면 시작도 말았어야지. 그게 무슨 짓이냐?” 그러게 말이다. 나도 괴로웠다. 이제 사귄 지 한달.

“미안… 그냥 친구로 지내자.” 불과 2년 전,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을 다시 꺼냈다. 그가 황당해하는 모습을 보니 민망해서 미칠 것 같았다. 나의 잘못되고 섣부른 판단이 만들어낸 참사였다. 모든 상처는 그가 떠안아야 했다. 그는 “이제 친구로도 지낼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내 번호를 지우고 에스엔에스(SNS) 친구도 차단한 채 연락을 끊어버렸다. “친구일 때 정말 좋았는데. 친구로 지낼 수 없을까”라고 말하는 나는 또다시 나쁜 여자였다. 여동생조차 내 편을 들지 않았다. “염치가 있어야지. 연락할 생각하지 마.” 나는 그와 친구들 사이에서 영영 나쁜 여자로 술자리 안주로 씹힐 것이다. 나쁜 여자가 되고 보니 알겠다. 이성과 마음이 같다는 순진한 생각이 나쁜 여자를 만든다는 사실을. ‘남자로서 괜찮은 사람’이라는 평가는 결코 사랑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쁜 여자가 그에게 느끼는 감정은 미안함뿐이다.

죄책감 느끼는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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