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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31 20:01 수정 : 2013.06.30 15:06

인도네시아의 열대우림에서 자바긴팔원숭이를 만나기 위해선 먼저 ‘정글의 법칙’을 익혀야 했다. 필자인 김산하 이화여대 에코과학부 연구원이 자바섬의 구눙할리문살락 국립공원에서 쌍안경으로 긴팔원숭이를 찾고 있다. 김산하씨 제공

[토요판]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1> 짐을 싸서 정글로

남들이 유학길에 오를 때
나는 밀림행을 택했다
‘어른의 대화’ 하던 이들도
원숭이에 한번, 밀림에 한번
안색이 최소 두번은 밝아졌다

머나먼 인도네시아 자바섬
구눙할리문살락 국립공원 안
김이 피어오르는 열대우림
꿈에 그리던 밀림에 도착했다
이곳의 유인원 긴팔원숭이는
한국인이 왔는지도 모를테지

방 한가운데 여행가방이 열려 있다. 벌써 몇 시간째 채워지길 기다리고 있다. 그저 긴 여행을 가는 거라면 조금은 더 쉬웠으리라. 하지만 이건 그냥 여행이 아니었다. 몇년이 걸릴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문제도 있었지만, 단순히 기간보다도 이 모험의 특별한 성격이 나의 짐 꾸리기를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렇다. 이건 모험이었다. 비유적인 의미에서의 모험이 아니라 진짜 미지의 세계로 뛰어드는 행위. 지금 같은 시대에도 가능하다는 사실이 놀라운 명실상부한 모험이었다. 그리고 나는 천연덕스럽게 모험을 위한 짐을 싸고 있었다.

긴팔원숭이 연구지역
나만의 여행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비행기에 올라탄 나는 눈을 감는다. 나의 행선지는 나머지 승객 전체와 얼마나 다를까? 먼 열대의 나라 숲 속의 야생동물을 향해, 오직 그 녀석 하나를 향해 내가 인생을 걸고 떠나고 있음을 누가 알까? 인도네시아의 긴팔원숭이를 만나러 왔습니다. 입국신고서에 이렇게 쓸 생각에 살짝 웃음이 났다. 긴팔원숭이 녀석은 지금 이 순간에도 전혀 영문도 모르고 있겠지? 비행기로 7시간이나 떨어진 곳에서 엉뚱한 한국인이 점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나에게 가장 많이 던져진 질문은 흥미롭게도 이 모험의 진위에 관한 물음이었다. 가령, “나 긴팔원숭이 연구하러 가”라고 말하면, “정말 긴팔원숭이 연구하러 가?”라고 묻는 식이다. 잘못 듣거나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서는 물론 아니다. 되물어야지만 풀리는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다. 그러고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환히 웃으며 나의 계획을 반기는 것이 아닌가. 정치가 어떻고, 경제가 어떻고, 심각하게 ‘어른 대화’를 하던 이들도 원숭이에 한 번, 밀림에 다시 한 번, 안색이 최소 두 번 밝아졌다. 보아하니 다들 동물 좋아하는데 왜 전혀 딴 걸 하고 살지? 긴팔원숭이 연구를 하러 떠남으로써 비로소 나는 사람들 속에 숨어 있는 어떤 야생에 대한 호기심과 그리움, 아직 죽지 않은 총기가 눈동자에 잠시나마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그들과 가진 짧고 긴 만남들을 통해 이게 나만의 여행이 아닐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처음 들었다. 내가 대표로 가지만 어쩌면 이 경험은 우리가 함께 간직할 것이라는 말없는 이해와 유대감을 나누었는지도 모른다.

남들이 유학길에 오를 때 나는 밀림행을 택했다. 이 사실이 나는 무척 자랑스러웠다. 이제는 그 어떤 좋은 곳에 간다 해도 별 뉴스가 아닌 시대에 전혀 엉뚱한 곳을 향해 방향타를 돌리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다. 꽉 막힌 도로와 반대 방향으로 시원하게 달리는 쾌감이랄까! 목적지도 속도도 중요치 않고 다만 자유롭게 나아간다는 것이 진행방향에 확신을 더해주었다. 비교 대상이나 기준이 없어서 남들과 의사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결국 비교가 목적인 대화를 차단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물론 이런 점을 놓치지 않고 농담거리로 활용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장인어른의 시선으로 보면 딱히 딸을 덥석 줄 만한 커리어는 아니지! 껄껄껄!” 그러면 대화 상대는 늘 따라 웃곤 했다. 뭔 소린지 알겠다는 뜻이었다. 동시에 그 가상의 영감탱이도 인정 안 할 수 없을 만큼 멋지게 해내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구의 허파, 야생의 궁극, 생명의 진원지

열대의 아침이 밝아온 어느 날. 덜커덩거리는 지프차는 비포장도로를 몇시간째 달리고 있다. 조수석에 앉은 나는 툭하면 열리는 문을 힘주어 잡으면서 경치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우아하게 뻗은 야자나무의 기둥이 하늘로 올라갈수록 가늘어지고, 그 끝에는 풍파에 지친 이국적인 이파리들이 묶여 조용히 흔들렸다. 이렇게 가다 보면 밀림이 정말 나오는 것일까? 인간의 영역이 끝나고 야생의 왕국이 시작되는 그 경계선이 실제로 있을까? 현지 가이드의 말을 믿고 무작정 가고는 있었지만 내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끝없는 계단식 논 사이에 용케 난 이 구불 길이 끝나는 어디쯤이리라. 그래도 건물이나 기반시설 같은 문명의 흔적이 눈에 띄게 드물어지고 있었다. 조금씩 나는 목적지가 가까워 오고 있음을 느낀다. 길가에 있던 이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뚫어지게 나를 바라본다. 여긴 관광객이 흔히 오는 곳이 아니다.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지만, 산이 많고 지형이 울퉁불퉁해서 아직 개발의 손길이 미약한 곳이다. 이름하여 구눙할리문살락 국립공원. 두 개의 보호지가 합쳐지기 전에는 그냥 할리문이라 불리었다. 할리문은 여기 말로 안개이다.

잠시 졸았나 보다. 이상하게 서늘해진 것 같아 주위를 살펴보니 사방이 어둡다. 분명히 아직 낮 시간이었지만 울창하게 자란 식물이 햇빛을 다 가리고 있는 게 아닌가! 그토록 기다리고 기다리던 밀림 입성의 순간을 놓쳤다는 분노에 휩싸임과 동시에 갑자기 눈앞에 펼쳐진 이 딴 세상에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운전사는 우스운 듯 나를 다독였다. “아직 도착 안 했습니다요. 여기도 국립공원 안이긴 한데 진짜 숲은 좀 이따 나타납니다.” 이 ‘곧’의 의미는 문화권마다 얼마나 다른가! 하마터면 또 잠들 뻔한 위기의 순간. 바로 그때 내 앞에 펼쳐졌다. 거짓말처럼 밀림이 나타났다.

꿈에 그리던 밀림이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열대의 우림. 신비로운 자태의 나무들이 당당하게 이곳이 야생의 제국임을 선언한다. 내린 지 얼마 안 되는 비의 축축함이 숲의 혈액처럼 줄기와 가지에 맺혀 흐른다. 넘실거리는 녹음은 실타래같이 엮여 은은히 율동한다. 형체조차 분간하기 어려운 덩굴과 잎이 뒤엉킨 녹색 골칫덩어리가 숲의 공간을 가득 메운다. 가지각색의 희한한 형태와 그에 못지않은 소리가 서로 질세라 다양성을 과시한다. 덤불 속에서 뭔가 부스럭거린다. 나무 위에도 기척이 있다. 앵앵거리는 곤충의 날갯짓은 귀 근처를 떠나질 않는다. 어디선가 새빨간 새 한 마리가 화살처럼 튀어나와 녹색의 과녁에 박혀 사라진다. 출렁, 시냇물이 돌을 휘감아 치고 지나간다. 여기가 바로 지구의 허파, 야생의 궁극, 생명의 진원지이다.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내 힘으로 찾아온 것이다!

자바긴팔원숭이 (학명 Hylobates moloch). 사람, 침팬지, 보노보, 고릴라, 오랑우탄과 함께 영장류를 이루는 긴팔원숭이의 아종. 긴 팔로 나뭇가지를 옮겨 잡으며 이동하고 전세계에서 자바섬에만 서식한다. 푸른빛이 도는 은색 털과 검은 머리, 긴 손가락을 지녔다.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적색목록상 ‘멸종위험’(EN) 등급으로, 4000여마리가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저기 어딘가에 긴팔원숭이가 있다. 내가 친히 뵙고자 찾아온 그 동물이 말이다.

목표는 영장목, 유인원 초과, 긴팔원숭이과에 속한 약 17종의 긴팔원숭이 중 자바긴팔원숭이라는 녀석이다. 영어로는 Javan gibbon, 학명은 Hylobates moloch. 은색긴팔원숭이라고도 불리는데 인도네시아 자바섬에만 사는 고유종이다. 동물원 안내판에서 빠지지 않는 체중이나 임신 기간 따위의 정보를 알 필요는 없다. 무엇보다 유인원이라는 점이 인간의 시점에서 중요하다. 우리도 유인원이기 때문이다. 영장류 중에선 물론, 동물의 왕국에서 두뇌가 가장 뛰어난 특별한 멤버십의 그룹이다. 그래서 사실 긴팔‘원숭이’라는 이름은 잘못되었다. 유인원과 원숭이는 각자 영장류의 부분집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물의 일반명은 원래 정확한 것이 아니고 이미 친근하게 자리잡은 이 이름을 일단 그냥 사용하기로 한다. 그런데 이 유인원 드림팀에서 가장 잘 알려진 침팬지와 고릴라는 아프리카 동물이다. 긴팔원숭이는 오랑우탄과 함께 아시아에만 사는 아시아의 유인원이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에 국한된 오랑우탄과는 달리, 긴팔원숭이는 북반구인 중국 남쪽에서부터 남반구인 인도네시아까지 폭넓게 서식한다. 이들의 분포지역 중 최남단에 해당되는 곳이 나의 연구지이다.

감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상황 파악을 하려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연구를 하러 이곳에 온 게 아닌가. 당장 살 곳부터 찾아야 한다. 음식은 어떻게 장만하는지, 조수로 고용할 만한 건장한 마을 청년은 있는지, 전화는 되는지 모두 미지수이다. 합쳐봤자 10여가구 정도 되는 작은 마을을 둘러보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여기는 중앙에서 공급하는 전기, 수도, 전신, 우편 시스템이 모두 미치지 않는 곳이다. 위태롭게 회전하는 물레방아가 동네의 수력발전을 책임지지만 기껏해야 백열전등 몇 개를 간신히 밝힌다. 정착한 지 얼마 안 됐을 즈음 노트북을 잘못 꽂아 온 마을이 어둠에 잠긴 뼈아픈 기억이 있다. 물은 숲에서 흐르는 냇물을 집까지 연결해서 쓰니 부족함이 없다. 다만 가끔 물고기나 뱀장어가 관을 타고 집에 놀러 오는 경우가 있을 뿐, 서부 자바의 상수원을 가장 먼저 쓰는 쾌감이 짜릿하다. 전화선은 없어도 마을 어귀의 동산에 올라가면 무선전화 신호가 터지는 5미터 반경의 원이 어딘가에 있다. 전화 걸다 괜히 배회했다간 소중한 신호를 잃을지 모른다.

파트너가 외나무다리에서 만난 가짜 이장

그럭저럭 생활은 해결되고 있었다. 제일 중요한 건 사람이다. 모든 것이 그렇듯 연구도 절대로 혼자 할 수 없다. 다행히 나는 처음부터 훌륭한 파트너가 있었다. 수마트라 남부에서 시아망이라는 다른 종류의 긴팔원숭이 연구에 참여했던 베테랑인 아리스를 연구 보조원으로 스카우트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남자다운 골격과 여유 넘치는 매너, 매력적이면서도 실력이 출중한 친구이다. 아리스와 함께 나는 당장 헤드헌팅에 나섰다. 선발기준은 말 잘 듣고 발이 빨라야 한다는 것. 밀림 속에서 동물과 한판승부를 벌여야 한다는 임무가 걸려 있었다. 지나가다 만난 똘망똘망한 인상의 젊은이 한 명, 그가 소개한 친척 동생 또 한 명, 이렇게 팀이 삽시간에 꾸려졌다.

며칠 뒤 예상 못한 일이 벌어졌다. 마을의 이장 격을 자칭한 사람과 두 명의 괴팍해 보이는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만나야겠다며 찾아왔다. 은근한 눈길을 주며 담배를 한참 태우더니 이내 입을 열기 시작한다. 얘기인즉슨 내가 동네의 규율을 위반했다는 것이다. 나의 연구팀에 선발된 인력은 전부 ‘외부’ 사람으로서 ‘내부’ 사람을 우선적으로 고용해야 하는 마을의 원칙을 어겼다는 것이다. “예? 이 두 명은 여기 사람이 아닌가요? 분명히 여기서 만난 애들입니다.” 무슨 소리. 얘네들은 엄연히 ‘윗마을’ 사람들이지 우리가 사는 이 ‘아랫마을’과 전혀 다르다는 답변이다. “고작 걸어서 10분인데요?” 소용이 없다. 연구 보조원의 월급의 5%를 마을 발전을 위해 달라는 게 결론이다. 대충 얼버무려 보내고 뒷조사를 해보니 진짜 이장님도 아닐뿐더러 이런 수작을 부린 전력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앞으로 알고 지낼 동네사람인데 강경책으로 나갈 수만은 없다. 마을의 삐걱거리는 다리 하나를 보수해주는 회유책을 펴는 대신 고용문제는 그냥 잠자코 있기로 했다. 그런데 의외로 잠잠한 게 아닌가? 아리스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응, 그 외나무다리 중간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또 뭐라 하길래 일없다 했지. 마침 손에 망치가 들려 있어서 그런지 순순히 가더라?”

정글의 법칙이란 이런 건가 보다. 다음날은 과연 어떻게 펼쳐질까 그 미지의 미래를 꿈꾸며 나는 잠자리에 들었다. 물과 밤 짐승 소리가 무거워지는 밀림의 어둠을 적시고 있었다. 이제 채비는 끝났다. 내일 막은 올라간다. 긴팔원숭이야, 나 이제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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