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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험을 이어가는 동안 지치지 않고 항상 행복했던 원인 중 하나는 좋은 사람들을 만나서였다. 인도네시아 청년 누이와 싸리의 밝음과 순수함. 도시에서 만나보기 어려운 ‘투명한 인간성’을 마주할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김산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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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⑫ 정글에서 만난 친구
바나나 잎이 부드럽게 펄럭이는 어느 고요한 오후, 삶과 세월은 차분히 익어가고 있었다. 햇볕과 바람은 한데 어우러져 서로 친근한 장난을 쳤고, 논둑 옆을 흐르는 냇가에서는 물방울들이 돌에 첨벙첨벙 부딪히며 까르르 웃었다. 흙도 고운 알갱이를 또렷이 드러내며 공기와 속삭였다. 한낮 동안 잘 데워진 시멘트 마당엔 오늘도 개미들이 줄지어 가며 바쁜 척을 떨었고, 무심한 고양이는 바로 옆에서 또 한번의 낮잠을 청하고 있었다. 딸랑딸랑. 천장 가까이 매달아 놓은 철제 장식품이 금속만의 청아한 음색을 흩뿌렸다. 오늘의 기대가 충족되고도 아직은 내일을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하루의 편안한 틈새 속에서, 미물과 사물은 이렇게 함께 있음을 그저 관조하며 시간 속을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열대우림은 젊음이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수를 다 헤아릴 수 없는 잎이 다 조금씩 다르게 달려 있고 조금씩 다르게 움직인다. 그러면서도 그 움직임의 자유는 어떤 범위 안에서 벌어지도록 제한되어 있어 한 나무라는 틀 안에 모이면 통일된 아름다움을 나타낸다. 폭풍이 들이닥치기 전, 곧 다가올 거센 날씨의 징조를 드러내주는 나무의 몸동작을 보라. 굵은 가지나 기둥일수록 흔들리는 폭은 좁지만 가장 기본적인 동선을 긋는 안무를 맡고, 얇은 가지나 이파리일수록 이 동력학에 지배를 받지만 중심부가 누리지 못하는 말단의 자유를 누리며 파르르 떤다. 한곳에 뿌리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바람에 활처럼 나부끼는 이 춤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박혀 있되 움직임이 허락된 신세. 땅 밑의 나무는 끝없는 갈증을 적시고 몸을 세우기 위해 결의에 찬 듯 단단하고 고집스럽다. 땅 위의 나무는 빛을 맞이하고 바람과 대적하지 않기 위해 성실하면서 유연하다. 가만히 있지만 절대적으로 정적이지 않은 나무의 잔잔한 미세 움직임의 군무만큼 눈을 두기에 편안한 것이 없고, 보아도 보아도 지루하지 않은 것이 없다. 여기에 견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비슷한 방식으로 감상할 수 있는 잔디밭이나 들판, 그리고 수만가지 파도가 함께 일렁이며 만드는 바다 정도가 될 것이다.
과학을 약간 곁들인 미학적인 관점을 적용하면 열대우림 전체를 보며 이와 비슷한 무용 또는 구성예술을 관람할 수가 있다. 수십미터 위로 쭉쭉 뻗은 굵은 나무들이 직선적 요소가 주가 되는 기본 테마를 구축한다. 온갖 덩굴이 이 거대 식물들 사이의 간격을 잇는 횡적인 요소를 추가한다. 여기에 몸을 부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달라붙어 사는 착생식물이 점과 덩어리를 부여하고, 한없이 갈라지며 미세하게 분화하는 잎과 가시는 다양하고 장식적인 성분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여기저기 찍힌 붉은 열매. 밀림은 칸딘스키의 작품을 대할 때와 유사한 지각력의 적용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이런 조형적 아름다움보다 더 중요하고, 열대우림의 정체성과 더욱 밀접한 감상 포인트는 따로 있다. 가만히 있는 듯하지만 끝없이 움직이는 나무처럼, 울창하고 견고한 이곳이 사실은 끊임없는 재생이 벌어지는 공간이라는 점이다. 빛과 물이 풍부한 생육 조건 때문에 밀림은 그 어느 곳보다 식물 생장이 빨리 일어난다. 동시에 죽음도 도처에 널려 있다. 가장 위풍당당한 나무도 하루아침에 쓰러져 무대를 퇴장하고, 그렇게 만들어진 빛의 틈으로 조연들이 스포트라이트 경쟁을 벌인다. 잘린 가지에서는 어느새 새잎이 돋아나고, 돌아보면 어느새 시들어 있다. 모든 것이 쑥쑥 자라고, 모든 것들이 죽어 아래에 켜켜이 쌓인다. 수분과 영양물질, 무기물의 빠른 순환으로 열대우림은 매 순간 가쁜 숨을 몰아쉰다. 짙은 흙 밑엔 생명의 심장박동이 진동하고 녹음마다 활기의 땀이 맺혀 흐른다. 열대우림은 지금 한창인 생명활동의 현장이다. 열대우림은 젊음이다.
쾌활하고 적극적인 누이는 지칠 줄 모르는 두 다리로
야생동물을 종횡무진 쫓았고
과묵하고 단순 담백한 싸리는
매의 눈으로 숨은 동물 찾아냈다 긴팔원숭이 연구팀의 젊은 피
인도네시아 청년 누이와 싸리의
튼튼한 체력과 순수한 마음 덕에
연구뿐 아니라 일상도 즐거웠다 젊음. 머리를 딱 때리는 단어이다. 누구나 하는 얘기처럼 이 단어가 ‘한때’를 의미하기 때문인가? 젊음이 우리 사이에 회자될 경우 대부분 과거의 특정 시기를 뜻하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상실과 결부된다. 새뮤얼 울먼은 젊음이란 육체의 나이가 아니라 마음가짐이라고 일찍이 얘기했건만, 젊은 세대는 물론 나이 들어가는 어른들에게도 이런 지혜는 이제 별 의미를 갖지 않는 듯하다. 젊음이 요원한 이유 중 한가지는 우리가 젊음에 둘러싸여 살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것은 많다. 새로운 재료와 기획으로 만들어진 사물, 사업, 사건은 많다. 그러나 지금 새롭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이미 내일이면 하루만큼 낡은 것이 된다. 새로움을 생산하는 만큼, 딱 그만큼 낡음도 생산되는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상태가 아닌 것이다. 잠시만 유지되는 순간적인 개념과는 정반대로, 퍽 지속될 수 있어야 비로소 젊음인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젊음은 생명의 생리이다. 적어도 의욕이 넘치고, 풋풋하고, 왕성한 생명의 생리이다. 새것이 강조되기에 실은 노쇠와 권태로 둘러싸인 채 사는 우리들에게 젊다는 것의 진정한 에너지와 개념이 와 닿을 리가 없다. 그러나 열대우림의 넘쳐나는 젊음 한가운데에 있으면 그 어떤 노화작용도 영원히 멈추고 생명이 끝내 승리할 것만 같다. “얘는 그냥 숲에서만 일하도록 하자” 긴팔원숭이를 탐험하는 나의 생활에 한층 더 젊은 기운을 불러 넣어준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나와 동고동락한 세명의 연구보조원들이다. 그동안 자주 등장했던 수석 보조원인 아리스는 야생동물 연구 베테랑으로 가정까지 꾸민 명실상부한 어른이다. 이 친구도 누구 못지않게 끓어오르는 젊음을 간직한 사나이이지만, 워낙 유능하고 노련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어 우리 팀의 젊은 피라기보다는 동료로서 나의 가까운 친구가 되어주었다. 나머지 두명인 누이와 싸리는 그야말로 때 묻지 않은 인도네시아의 젊은 청년들이다. 숲과 동물이 아니었다면 도저히 만날 수 없었던 이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들 덕분에 나는 나이와 국적을 잊은 채 웃고 울고 어울렸다. 연구의 가장 초창기 답사차 이곳 구눙할리문살락 국립공원에 처음 발을 들여놨을 때부터 누이는 우리와 인연을 맺었다. 이름이 한국말로 하면 여동생을 의미한다는 말에 시원한 웃음을 지었을 때부터 나는 점을 찍어두었다. 국립공원에 레인저로 근무하는 삼촌 따라 연구초소에 놀러왔다가 우리를 만난 것이었다. 무슨 일에든 쾌활한 성격과 배우려는 자세, 적극적인 사회성이 같이 일하기 그만이었다. 매우 독실한 이슬람 신자인 누이는 성지인 메카를 향해 하루에 다섯번 절하는 일도 절대로 빼먹는 법이 없었는데, 숲에서 동물을 추적할 때에는 건너뛸 줄도 아는 현실감각과 유연성도 있었다. 처음에는 요리사 겸 연구보조원으로 고용을 했다. 어차피 둘 다 필요한 마당에 동시에 두가지 업무가 가능하다고 하니 얼씨구나 하고 결정했던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저녁시간 밥상에서 아리스가 국을 한 숟갈 떠먹더니 하는 말. “얘는 그냥 숲에서만 일하도록 하자.” 그 이후로 누이는 국자와 냄비를 놓고 숲을 종횡무진 누볐다. 사실은 요리를 그렇게 즐기는 편은 아니라는 얘기도 언젠가 실토를 받은 기억이 있다. 뭐, 맛있게 한다고 한 적은 없고 단지 할 줄 안다고 했을 뿐이니 할 말은 없는 셈이다. 누이는 인도네시아 사람 기준으로도 키가 작은 편에 속했다. 본인의 사회생활에서는 이 특징이 어떻게 작용했을지 모르지만, 야생동물을 쫓아 풀숲을 헤쳐야 하는 직업적 요구조건에는 이보다 잘 들어맞는 신체는 없었다. 게다가 누이의 다리는 웬만해서는 지칠 줄을 몰랐다. 내가 거의 거품을 물 지경에 이르러도 누이는 여전히 전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서는 빙그레 웃으며 기타를 연주하고, 영어 단어 몇 개를 묻고 외우고, 조용히 앉아 꾸란(코란)을 읽어 내렸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누이는 늘 한결같았다. 막내 연구보조원인 싸리는 누이의 사촌 동생이다. 형과는 정반대의 성격을 가진 이 친구는 말이 없고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가늠하기 어려운 표정의 소유자이다. 가만히 허공을 응시하는 눈이 어떤 때는 마치 화가 잔뜩 난 사람 같았다가, 또 어떤 때는 나비를 감상하는 강아지 눈망울 같기도 했다. 나의 긴팔원숭이 연구팀에 합류할 의사가 있는지를 물어보기 위해 만난 첫날도 싸리는 자신의 개성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줬다. 고용이 되기 위해 그 순간만이라도 잘 보이려는 노력 따위는 조금도 하지 않았다. 모든 질문에는 단답형으로 응수했고, 짧아진 대화 덕분에 길어진 침묵의 시간은 먼 산 쳐다보기로 채울 뿐이었다. 싸리를 우리에게 소개한 누이는 물론 곁에서 그냥 웃고만 있었다. 일할 마음도 옳게 없는 녀석을 잘못 끌어들이는 건 아닐까 불안한 마음으로 근무가 시작되었지만, 이런 우려는 이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야말로 단순 담백한 싸리는 성격에 복잡하거나 꼬인 것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시키는 일은 묵묵히, 모든 임무는 말없이, 아침이 되면 터벅터벅 걸어오고 일과가 끝나면 터덜터덜 돌아갔다. 노상 한가지 티셔츠만 입어 구멍이 아예 옷을 점령해버려도 전혀 문제없었다. 단순한 성격과는 달리 싸리의 눈은 의외로 날카로웠다. 워낙 먼 산에다 연습을 많이 했던 덕인지, 싸리는 복잡한 나무 수풀 속으로 숨은 동물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럴 때도 별다른 설명은 없었다. 그저 “있어요”라고 할 뿐. 지금도 이들을 떠올리며 하늘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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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오른쪽이 필자)이 함께 술을 마시던 시간을 나는 ‘그리움’으로 기억한다. 김산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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