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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림과 그곳에 사는 동물이 좋아서 고등학생 시절 그린 그림이다. 한데 살 수 없는 동물이지만 다 같이 그려보았다. 김산하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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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17) 그 냄새, 그 추억
냄새만큼 옛 기억을 강력하게 불러일으키는 건 없다는 말이 있다. 심지어 우리가 그리도 의지하는 시각보다 시간여행을 촉발하는 관점에서는 후각이 월등한 위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갑자기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에 실린 향기가 어릴 적 매일같이 들르던 문방구를 떠올리게 하고, 우연히 연 약통에서 피어오른 소독약 냄새가 병원에서의 아픈 추억을 되살려준다. 사람의 향취도 마찬가지로 강력하다. 옛 애인의 향기에 놀라 걷다가 뒤를 돌아보는 광고도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사람 못지않게 ‘의미 있는’ 체취를 가진 동물을 꼽으라면 단연 영장류이다. 개나 고양이, 쥐와 같이 주변에 흔한 동물의 냄새가 어떤지 익히 아는 이는 많지만, 모르긴 몰라도 냄새만으로 개별 동물을 구별하는 사람은 아마 극히 적을 것이다. 물론 나라고 해서 ‘동물 소믈리에’라도 될 만한 코를 가진 달인은 아니다. 다만 어떤 우연한 기회에 잊고 있던 체취가 생각났고, 그 덕분에 마음은 멀리 옛이야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 곤충소년들을 왜 불편해했던가
키가 유난히 큰 나무들이 모여 마치 밀림의 지붕을 이루고 있는 것 같은 곳이 있다. 긴팔원숭이 두 집단의 영역이 겹치는 이 접경지대에서 우리는 범접할 수 없는 높이에서 노는 곡예사들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해서 고개를 쳐들고 있자니 목이 아파 나는 전자 거리측정기를 꺼내 들어 대체 얼마나 높은가 재보았다. 나무 바로 밑의 수직선상에 있진 않았지만 간단한 피타고라스 계산에 의해 나무가 족히 50m는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너희들은 왜 밑에서 바라보기만 하니? 아니꼬우면 올라오든가? 고집스럽게 바닥에 달라붙은 우리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긴팔원숭이들은 가끔씩 우리를 내려다보았다. 그들을 관찰하기에 마땅한 곳을 못 찾아 서성이고 있을 때 수석연구보조원인 아리스는 그답게 멋진 바위를 하나 발견하더니 그 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디즈니 만화영화 <라이온 킹>에서 사자가 포효하는 장소인 ‘프라이드 바위’(Pride rock)를 쏙 빼닮은 이 돌덩이는 긴팔원숭이들이 모여 노는 나무를 향해 위로 비스듬히 돌출해 있었다. 그런데 더 재미있게도 바위 끝에 서니 식물 하나가 기다랗게 자라나 있고, 그 끝은 약간 뭉툭했다. “여기 아예 마이크가 설치되어 있네!” 넉살 좋은 아리스의 적절한 농담에 우리는 모두 웃었다. 정말 그곳은 밀림 한중간의 콘서트장 같았다. 다만 관중이 공연자보다 더 위에 있을 뿐.
우리는 돌아가면서 한마디 하기 시작했다. “아, 아! 마이크 시험중!” 저것들이 아주 돌아버렸구먼. 긴팔원숭이들의 표정은 왠지 더 한심하다는 듯한 인상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늘 이야기보따리가 풍부한 아리스는 예전에 일하던 곳인 인도네시아 남부 수마트라에서의 경험담을 풀어놓았다. 시아망 긴팔원숭이가 거리 계산을 잘못하고 뛰었다가 아래로 추락해 잠시 정신을 잃은 에피소드, 뾰족한 가시를 잔뜩 단 호저가 밤에 베이스캠프에 찾아와 비누를 다 먹어버린 사연, 자기도 모르게 사슴을 놀래주고 들개 한 무리에 둘러싸인 사건 등등 무용담은 무궁무진했다. 당시 동료 중에는 숲에서 호랑이를 보고 놀란 가슴을 쓸어내린 사람, 또 머리가 사람 머리만한 뱀을 본 충격에 그 자리에서 일을 그만둔 친구도 있었다는데, 얘기가 이쯤에 이르자 나머지 친구들의 얼굴에 불안한 기운이 엄습해왔다. 그때 긴팔원숭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즐거움도 잠시, 우리도 자리를 떠야 했다. 누군가 위에서 ‘실례’한 변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막 움직이기 시작한 옆 친구의 체취와 땀과 섞이더니 새삼스러운 날카로움으로 내 코를 찔렀다. 이게 뭔 냄새더라? 오호라. 나는 어느덧 뇌의 오래된 굽이굽이를 유영하고 있었다. 모두 이렇게 시작됐었지.
어린아이 시절부터 나는 분야가 확실했다. 동물 그리고 그림. 이 두 가지는 둘이 아닌 하나였고, 바로 나의 서식지이자 내가 속한 생태계였다. 기억이 미치는 시간 이래로 나는 줄곧 동물을 좋아하고 탐구해왔으며 동시에 그들을 묘사하고 표현했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이 세계에 종사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확고해서, 그렇지 못한 사람은 어딘가 문제가 있다고 여길 정도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비슷한 취향을 가진 이들과 잘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소위 말하는 동물박사, 곤충소년을 만나면 모두 어딘가 편협한 전문성을 추구한다는 점이 나는 마음에 걸렸다. 말하자면 오타쿠식 열정에는 동감할 수 없었던 것이다. 각종 생물의 이름과 서식지, 먹이와 습성을 줄줄 외는 그들의 어조에는 순수함과 의미가 결여되어 있었고, 보이는 대로 잡아 채집하는 몸짓에는 애정과 철학이 부족했다. 집으로 놀러 가면 그들은 수십 마리의 곤충을 핀으로 꽂아 만든 표본 컬렉션을 자랑스럽게 선보였지만 인상적이긴커녕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은 딱 한 가지였다. ‘저렇게 좋아하는 것보단 아예 무관심한 것이 낫지 않을까?’ 그것이 어린이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한참 뒤에 알게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동물을 좋아한다’는 이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동물을 구매하고 분양하면서 생명으로 수집가적 욕망을 채우며 동물 암시장에 기여하고 있다. 또는 낚시와 사냥 등 살상의 요소가 명확하고 핵심적인 행위를 즐기면서도 그것이야말로 자연을 접하는 올바른 방식이라 정당화한다. 이런 취미가 없더라도 많은 동물 전문가는 일반인의 순진한 발견과 깨달음을 일축하고 폄하하는 즐거움으로 사는 듯했다. 누구나 자연에 관심을 갖고 자연과 관련된 일에 뛰어들어야 한다고 믿었던 나는 이들이 보이는 배타성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들이 내세우는 전문성에 거부감을 느꼈다. 나는 동물이 ‘분야’에 갇히는 것이 싫었다.
긴팔원숭이 하염없이 쫓는데 누군가 위에서 ‘실례’한 변이
아래로 떨어져 코를 찔렀다
이게 뭔 냄새더라? 오호라!
그 일은 이렇게 시작되었지 예기치도 않은 그 기습 공격
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젖었고
침팬지는 겨드랑이를 긁으며
나의 몰골을 감상하는 거였다
땀·변·타액 범벅이 된 그 냄새 동물을 그린다는 것의 그윽한 의미 그림은 그런 나의 고민을 모두 해결해주었다. 관찰과 독서를 통해 알게 된 동물은 연필 끝으로 한번 더 짚고 넘어감으로써 내 안에서 완결되었다. 동물을 그린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넘어가기 쉬운 부분들을 깨알같이 짚어보게끔 해준다. 사슴의 자태를 감상한다고 해서 몸통 대비 머리의 비율이나 뒷다리의 모양까지 정확하게 인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은 시각의 건성을 훌륭하게 보완해준다. 둘째, 채집이나 포획 등 침해적 행위에 대한 멋진 대안이다. 사람은 자기가 좋아하는 대상에 대해 뭔가 행위를 하고 싶은 천성이 있다. 그렇다 보니 자연을 소유하거나 제압하는 식으로라도 자연과 ‘상호작용’하고자 하는 것이다. 동물을 수집하는 대신 그림을 그리고 모으면 될 일 아닌가. 셋째, 그림은 이미 있는 자연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도감에 나온 예쁜 세밀화는 야외에서 만난 새의 아름다움을 배가해준다. 사진 보고 기대했다가 실물 보고 실망하는 따위의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비어트릭스 포터의 토끼, 고슴도치 그림을 마음에 품은 상태에서 나가 만나는 동물들은 오히려 더 귀엽고,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넷째, 그림은 동물의 행동과 생태의 세계를 자연스럽게 들여다보게 해주는 창문이다. 동물을 그리려면 반드시 어떤 자세와 장면을 정해야 하고 또 배경을 채워 넣어야 한다. 기린은 목을 길게 뻗는 자세가 가장 어울리지. 아, 그렇다면 잎사귀를 따 먹느라 그러는 거겠지? 가만있자, 그러면 그 정도로 높은 나무가 요 옆에 있어야겠네. 동물행동학과 생태학이 이보다 더 잘 녹아든 매체는 없다. 다섯째, 사진은 현장에서 동물을 방해할 수 있지만 그림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그릴 수 있다. 비용의 차이도 엄청나다. 여섯째, 일곱째, 계속 나아갈 수 있지만 이쯤에서 멈추자. 장점의 나열이 중요한 것은 아니리라. 작가는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끔 한다고 했지만, 나는 내가 그린 동물의 입으로 울고, 짖고, 포효하고 싶었다. 원하는 것이 확실하다 보니 나는 입시의 부담을 별로 느끼지 않았다. 성적을 고려해서 동물 관련 학과 중 아무 데나 넣어 달라고 어머니에게 부탁하고서 나는 원서 접수에 관심을 두지도 않았다. 지원한 대학도 딱 한 곳. 입학고사를 보러 간 그 캠퍼스에 소와 흑염소가 돌아다니며 풀을 뜯는 것을 보고 나는 매우 흡족했다. 그런데 막상 다녀보니 동물을 공부하는 이유가 내 생각과는 전혀 딴판이었다. 어떻게 하면 요놈을 잘 살찌워 잡아먹을 것인지 궁리하는 분야라는 사실에 나는 뒤늦게 새삼스럽게 놀랐다. 목적은 완전히 달라도 어차피 동물은 동물이니까. 일단 하기로 한 것, 끝을 보는 대신 졸업 뒤에 순수생물학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기회가 나타났다. 저명한 동물행동학자인 최재천이 귀국해서 본격적으로 연구실을 꾸린 지 얼마 안 되었던 것이다. 더이상 볼 것도 없었다. 찾아가 보니 마침 까치를 연구하는 팀에서 남자를 필요로 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남자란 ‘노가다’를 의미한다는 것을 잘 알았지만, 뭐 상관없었다. 즐기는 기분으로 까치의 영역행동을 연구한 석사과정이 끝날 때쯤 교수님이 방으로 나를 불렀다. “자네 영장류 해볼 생각 있나?” 하루 고민하고 알려드리겠다고 했다. 왜 하루가 필요했을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닌 시간인데. 다음날 나는 비슷한 시간에 교수님 방문을 두드렸다. “영장류, 한번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나의 교수님은 곤충을, 그것도 아주아주 작은 벌레를 전공하신 분이었다. 교수님이 아니더라도 어차피 한국에서 야생동물을 직접 다루는 영장류학자는 전무했다. 직접 지도를 하실 순 없었지만 다행히도 일본의 유명한 영장류학자인 마쓰자와 데쓰로와 친분이 닿아 학생 한 명을 보내기로 이미 얘기가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것이 유학인지 뭔지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몸만 가는 것. 나는 흔쾌히 몸을 이동시켰다. 어스름이 짙어지는 어느 날 저녁, 나는 큰 가방을 질질 끌고 이누야마 소재 교토대학교 부설 영장류연구소를 향해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첨벙하는 소리에 돌아보니 큰 물고기가 수면 밖으로 등지느러미를 드러낸 채 개천을 역류하고 있었다. 달빛은 아무도 없는 길에 은은한 광채를 한 줌 뿌리고는 검은 구름 뒤로 자취를 감추었다. 어떤 대문에 다다르자 주변 동네와 다른 기운이 감지되었다. 공기의 맛이 달랐다. 분간이 안 되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인간의 것이 아닌 움직임이 이는 것만 같았다. 바로 여기였다. 선명하게 보이진 않았지만 감각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영장류의 세계에 들어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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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교토대학교에 있는 영장류연구소에서 인지실험을 수행 중인 ‘아줌마 침팬지’다. 필자에게 침을 뱉은 바로 그 침팬지다. 김예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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