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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07 19:58 수정 : 2014.02.09 11:47

코스타리카 저지대 열대우림에서 만난 고함원숭이 한 마리가 꼬리를 가지에 감은 기이한 자세로 나무를 타고 있다. 단박에 관심을 빼앗은 천진한 녀석은 개가 짖듯 우렁찬 소리도 들려주었다. 테구 프리얀토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 박사 김산하의 탐험 / (18) 정글의 녹색 에너지

사람은 크든 작든 주기적으로 찾아갈 수 있는 녹지가 있어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 바탕화면에 멋진 경치의 사진을 깔아놔야 소용없고, 숲 테마로 잘 꾸며진 인테리어에 둘러싸여 있다 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숨 쉬고 먹는 일만큼이나 삶에서 대체가 불가능한 것이 자연이고, 그 어떤 방식으로든 자연을 재현(再現)하려는 시도는 명확한 한계를 안고 출발한다. 자연의 형상화는 깊은 감동을 줄 수 있을지언정, 인간을 완전하게 품어줄 수는 없다. 그러기 위해서 그 자연은 최소한의 완전성을 갖춰야 한다. 고립된 가로수 한 그루, 창틀에 놓인 화분 몇 개 가지고는 불충분하다. 사람의 손길과 무관하게 스스로 작동하는 시스템이 살아 있는 최소한의 생태계여야 한다. 금싸라기 땅이 녹음으로 그 면적이 덮이도록 실제로 할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녹지(綠地)이다. 인간의 수많은 용도를 모두 제쳐두고 그저 생물들에게 권한을 모두 이양한 공간이어야 비로소 인간도 찾아들 수가 있고, 그 공간에 의지해서 살아갈 수가 있다. 녹색의 땅은 선택이 아닌 필수이다.

흙이 있는 곳에 꽃과 초본류를 심다

밀림에서 오랜 시간 동안 폭 빠져 지낸 사람은 녹지에 대한 갈증을 잠시 잊고 산다. 매일 들이켜는 숲 공기로 촉촉해진 허파는 더 이상 바랄 게 없고, 동식물로 늘 정화되는 안구는 건강하고 동공은 편안하다. 물소리와 노랫소리만 상대하는 귀는 성격마저 좋아진다. 특히 열대의 비가 퍼부을 땐 몸 전체가 저 튀어오르는 흙처럼 춤추고 약동한다. 그러나 그를 녹지가 턱없이 부족한 도시로 옮겨놓으면 며칠도 채 가지 않아 괴로움에 허덕이게 된다. 나의 경우, 다행히 집 근처에 비교적 큰 공원이 있고, 조경 개념으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의사(擬似)자연이 아니라 원래의 식생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곳이다. 컴퓨터 화면과 인간관계로부터 자유롭고 싶을 때 찾아가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는 불안함이 있다. 얼마 안 되는 녹지이기 때문에 이곳에 대해 집착이 생기고 이를 지키고픈 마음에 신경이 곤두선다. 다람쥐 몫의 도토리를 주워 가는 아줌마들이 몹시 못마땅하고, 공원길을 육상코스로 착각한 사람들이 불만스럽다. 점점 늘어만 가는 인공시설과 현수막을 보면 관할 구청이 못 미덥기만 하다. 여기라도 이렇게 자연 그대로 남아 있는 사실 자체가 물론 하나의 기적이라면 기적이다. 그런데 녹지 한 조각에 상대적으로 많은 이가 의지하다 보니 이 작은 숲도 수용능력의 한계에 다다른 것이 아닌가 걱정스런 마음으로 산책을 떠난다. 보고 싶었던 새를 전혀 보지 못하고 돌아온 날에 시름은 한층 깊어만 간다.

우리나라보다 크기는 작지만
50만종의 생물이 사는 코스타리카
도시에서 밀림 향수병 걸린 나는
24시간 이상 걸리는 항공권을
따져보지도 않고 질렀다

거미원숭이 보고 탄성 지르다
몇십분 뒤 만난 고함원숭이
만화에나 나올 법한 큰부리새
녹지 부족한 도시에서 괴로웠던
눈·귀·허파가 활짝 열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내 집 주변의 아주 작은 녹지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다용도실 문 바깥에 심어진 몇 그루 나무에 멧비둘기가 둥지를 튼다는 것을 알았고, 거실 앞 창문의 구부정한 소나무에는 어치 부부가 종종 쉬러 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는 관리인에게 낙엽을 모조리 치우지 말 것을 부탁하고, 흙이 있는 곳에 꽃과 초본류를 심었다. 어디서 구한 나뭇조각도 옆에 놓고 벌레가 꼬이길 기대했다. 한쪽 벽에만 난 담쟁이의 일부를 데려와 빈 벽 앞에 심고 새 출발을 부탁했다. 가족들도 창문 너머의 자연을 보기 시작했고 먹고 남은 음식도 종종 뿌려주는 등 이 움직임에 합세했다. 원하는 만큼은 아니었지만 나의 소규모 도심녹지화 프로젝트는 아주 조금씩 실효를 거두는 듯했다. 밀림을 이곳으로 옮겨올 수는 없었다. 다만 파편에 가까운 자그마한 땅이라도 녹색으로 칠할 여지가 있다면 그렇게 해볼 수는 있었다. 물론 이런 작은 조각만으로는 ‘어엿한 자연’이 되기에 여전히 부족하다. 그러나 누가 알랴? 산산이 부서진 지구 녹지들의 조각 모음에 나도 모르게 기여하고 있는지.

‘뱀이 지나다님. 반드시 장화를 착용할 것’

나의 삶은 세상에 어떤 기여를 하고 있나. 야생 영장류의 뒤꽁무니를 쫓으며 열대우림을 누빈 이 커리어가 우리 사회에 과연 어떤 도움이 될까 생각해본 적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학계나 동물원 등을 제외한 세상하고는 하등의 관계가 없는 듯하다. 흥미롭게도 처음으로 영장류학으로 사회에 일말의 기여를 한 계기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왔다. 바로 영화 <킹콩>이 2005년 말에 세계 동시 개봉을 하게 된 것이다. 건물을 때려 부수고 여자를 납치하는 광폭한 성격의 이 상상 속 괴물이 실제 고릴라와 얼마나 비슷한지 기자가 물어온 것이었다. 영화에서 묘사된 바와는 달리 고릴라는 인간이 자극하지만 않으면 온순한 동물이며 난폭한 모습은 왜곡되었다는 사실을 알렸다. 또 침팬지라면 때때로 원숭이를 합동으로 사냥해서 잡아먹는 등 살육을 하기도 하지만 고릴라는 거의 순전히 채식만 한다는 점도 곁들였다. 인간의 그릇된 편견에 맞서 동료 유인원을 변호해 주었던 것이 내가 전공한 영장류학을 사회적으로 활용한 첫 번째 사례였다.

한참 후에 또 다른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봄날, 나는 코스타리카의 열대우림에서 약 한 달 동안 열리는 대학생 야외수업에 조교로 초청한다는 소식을 전달받았다. 인도네시아의 영장류 연구를 함께 구상하고 논의하던 미국인 박사로부터 온 제안이었다. 잠깐, 어디라고? 코스타리카?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번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여기라면 만사를 제치고 가야만 했다. 생물을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코스타리카는 단연 으뜸으로 꼽는 꿈의 행선지 중 하나이다. 크기는 우리나라보다 작지만 미국과 유럽을 합친 것보다 많은 약 50만 종의 생물이 살고 있다. 지구 전체 육상면적의 0.03%만을 차지하지만 지구 전체의 생물다양성은 약 5%를 차지하고 있다고 하면 말 다한 것 아닌가. 단위면적당으로 환산하면 세계 1위라 할 수 있다. 원래 다양한 종의 생물상을 보유하고 있었던 곳이긴 하지만, 그걸 그냥 놔둬서 오늘날에 이른 것은 아니다. 한때 라틴아메리카에서 삼림 훼손이 극심한 나라 중 하나였던 코스타리카는 자국의 풍부한 자연자원의 가치를 깨닫고, 보전과 체계적 관리를 바탕으로 과학연구 및 생태관광산업을 적극적으로 육성하면서 오늘날 국제적인 성공 모델로 추앙받고 있다. 정부 당국에 따르면 국토의 약 4분의 1이 엄격하게 보호되거나 개발이 제한된 땅이라 할 정도로, 코스타리카는 자연자원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여기에다가 동쪽으로는 카리브해, 서쪽으로는 태평양과 맞닿아 있어 해양생물에 대해서도 둘째가라면 서럽다. 나는 여정이 24시간 이상 걸리는 항공권을 거의 따져보지도 않고 사고서 갈 날만을 기다렸다. 이윽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출발일의 날이 밝았다. 나는 생물다양성의 ‘핵’을 향해 일어났다.

말할 수 없이 길고 지루한 탑승 및 대기 시간, 그리고 수차례의 환승을 감내한 끝에 나는 마침내 코스타리카에 입성했다. 마음이 밀림이라는 콩밭에 가 있는 사람에게 수도는 그저 자원을 모으는 곳에 불과하다. 색다른 건축물도 흥미롭고, 길거리 음식마다 궁금하지만, 그런 건 야생동물의 거처가 최종 목적지가 아닐 때의 얘기이다. 나는 딱 하룻밤만을 지내고 다음날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는 코스타리카 북동부에 있는 라수에르테(La Suerte) 생물학 연구스테이션이었다. ‘행운’을 뜻하는 이름의 이곳은 미국에 본부를 둔 마데라스 열대우림 보전소(Maderas Rainforest Conservancy)가 소유한 자연림이자 현장 연구 및 학습장이었다. 수도인 산호세가 위치한 코스타리카 중앙지대는 산악지대라 저지대에 있는 숲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꾸불꾸불한 도로를 조심스럽게 달려야 한다. 어떤 곳에는 아찔한 낭떠러지가 난간도 없이 곡선구간을 반기고 있었다. 듣자 하니 며칠 전에도 차가 제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저 밑으로 추락했단다. 나는 내 목적지의 이름을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무사히 도착하고 또 무사히 돌아왔으니 이 글이 여러분 앞에 있지 않겠는가? 먼지를 뿌옇게 일으키며 드문드문 널린 농가를 지나 이윽고 나는 숲 한중간에 있는 학생숙소 겸 식당 겸 교실로 쓰는 본관 건물에 도착했다. 바깥에는 수십 켤레의 고무장화가 거꾸로 걸려 있었다. 그 옆에 서 있는 작은 간판이 눈에 띄었다. “뱀이 수시로 지나다님. 반드시 장화를 착용할 것.” 이야, 여기 제대로구먼! 실제로 코스타리카에는 수십 종의 맹독성 뱀이 살고 있고, 그중에서 가장 위험한 뱀인 페르드랑스(Fer-de-lance: 머리가 뾰족한 창끝을 닮아 붙은 불어 이름)도 이 근방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위험을 잊게 하는 흥분이 감돌았다. 갑자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단체로 개 짖는 것 같은 우렁찬 소리가 들려왔다. 고함원숭이였다. 중남미 숲의 사운드이펙트(음향효과)를 담당하는 이들의 소리를 모르고 들으면 뭔가 괴기스런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머리 위로 붉은색 앵무새가 창공 가르며 나무 사이로 사라졌다. 발치엔 두꺼비 한 마리가 귀찮다는 듯 살짝 길을 피해줬다. 아 코스타리카구나. 내가 여기에 왔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지극히 규칙적으로 흘러갔다. 미국 전역의 대학에서 온 학생들을 지도하는 역할이 주어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숲 속에서 보냈다. 해발 50미터에 위치한 이 숲은 1993년부터 지금의 이름을 달고 연구 및 학습용으로 보전된 면적 317헥타르의 저지대 열대우림이다. 여의도 면적의 3분의 1이 조금 넘는 크기이다. 본관 건물을 중심으로 남쪽에 작은 숲이, 북쪽에 큰 숲이 펼쳐져 있다. 나의 임무는 그날의 수업 내용에 따라 학생들을 이끌고 숲을 탐험하는 것이었다. 첫날부터 운이 따랐다. 얼마나 들어갔을까, 나무 꼭대기에서 희미한 기척이 느껴졌다. 인도네시아에서 나무 위 긴팔원숭이를 찾는 일에 단련되어서일까? 거미원숭이였다! 생태적으로 긴팔원숭이와 무척 흡사하지만 긴 꼬리가 또 하나의 팔 역할을 하는 거미원숭이. 내 눈에 익숙한 동작으로 세 마리가 나뭇가지 곡예를 하며 수풀 사이로 몸을 감췄다. 학생들은 탄성을 질렀다. 흥분이 채 가시지도 않은 몇십분 뒤, 계곡 변에 뻗은 나무의 명당자리에 검은색 물체가 포착되었다. 소리의 주인공, 고함원숭이들이 한낮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밀림에 처음 발을 들인 아이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름 숙달된 조교인 나의 표정도 똑같이 얼빠져 있었다.

집 앞 나무에 둥지를 튼 큰부리새의 새끼가 둥지 안에서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귀한 모습. 테구 프리얀토 제공

지상낙원 열대우림, 알고보니 고립된 섬

그런데 지내다 보니 이곳은 동물을 비교적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 봤을 때 감격해서 어쩔 줄 몰랐던 화려한 색의 화살독개구리는 어느덧 밟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대상이 되어버렸다. 작은 숲에 가면 중세 수도사의 모습을 꼭 빼닮은 카푸친 원숭이를 늘 만났고, 모모투스(motmot)나 오로펜돌라(oropendola)와 같은 화려한 새들이 방문자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었다. 숲에 갈 것도 없이, 숙소 발코니에서도 야생동물 사파리를 즐길 수 있었다. 우선 고함원숭이는 건물 앞 식물을 제 곳간으로 여기고 오는 단골손님이었다. 등나무 의자에 기대앉아 보는, 이들이 꼬리로만 매달려 이파리를 뜯어먹는 모습은 가히 공연 감상과 다를 바 없었다. 옆치기의 나무에는 나무늘보가 웅크리고 특유의 로하스(Lohas)적 삶을 구가하고 있었다. 느린 것 같아도 한 번씩 확인하러 가면 그 자리에 없기 십상이었다. 무엇보다 최고의 볼거리는 집 앞 나무에 둥지를 튼 큰부리새(영어로 Toucan) 부부였다. 디즈니 만화영화에 나올 법한 강한 캐릭터성과 열대의 화려한 미학이 한데 어우러진 이 생물을 야생에서 진짜로 본다는 사실은 보면서도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감동도 큰부리새의 새끼의 수줍은 출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한동안 부모가 구멍 안으로 먹이를 건네주는 것만 보이더니, 어느 날 자그마한 생명체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아직은 너무나 작지만 이미 어엿한 ‘큰 부리’의 새. 그가 본 세상의 첫 모습에 내가 있었을까.

어디서든 동물이 튀어나올 수 있기에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고 다녔다. 연구자 숙소와 식당 사이의 오솔길은 의외로 생물상이 풍부한 단거리 코스였다. 길에 들어서면 어김없이 바실리스크 도마뱀과 쏙독새가 황급히 자리를 피했고, 병정개미들이 점령할 때에는 아예 돌아가야 했다. 한번은 길을 지날 때마다 그르렁 하는 낮은 숨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아무리 살펴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이 소리는 계속해서 같은 자리에서 반복되었다. 소리만 들어서는 필시 무시무시한 짐승의 숨 고르는 소리라 이제는 살짝 긴장하지 않고서는 지나갈 수 없었다. 미스터리는 머지않아 밝혀졌다. 예상과는 정반대로, 아주 작은 벌새 한 마리가 길가에 둥지를 틀었는데, 사람이 나타나면 옆의 바나나나무 잎 아래로 피하는 바람에 마치 선풍기에 종이를 댄 것과 같은 효과가 난 것이었다.

코스가 끝날 때쯤 우리는 인근 마을에 가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숲에서 벗어나보는 홀가분함에 모두들 조금 들떴고, 버스는 왁자지껄한 학생 한 무리를 태우고 출발했다. 가는 길에 주변을 둘러보자는 제안에 모두들 흔쾌히 동의하고 창밖을 주시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숲 둘레는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바나나 밭이었다. 우리가 그토록 울창했다고 여긴 이 지상낙원 열대우림은 농장과 토지의 바다 한가운데에 고립된 섬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동물이 그리 많았던 것도 달리 갈 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마음이 한순간에 무거워졌다. 서울, 우리 동네의 작은 녹지가 생각났다. 지구 여기저기에 흩어진 이 녹색 조각들. 모두 사라질 운명일까. 아니면 하나둘 모아, 생명의 조각보로 만들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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