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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2.21 19:40 수정 : 2014.02.22 11:11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코벳 국립공원에서 야생 공작이 숲 속을 고고히 거닐었다. 야생동물과의 만남을 고대하는 나는 그들과의 만남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 최대한 조심스럽게 걷는다. 하지만 혹여 내 눈앞에 없어도 그저 오래 있어 주면 감사하다. 김산하 제공

[토요판] 긴팔원숭이박사 김산하의 탐험
(19) 내 마음의 야생앨범

공기의 흐름이 멎은 어느 날 오후 나는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밀림 속을 누비고 있었다. 매일은 아니지만 어쩌다 한 번쯤 들르는 둔덕에 가기 위해 좁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발을 옮겼다. 갈 길이 멀어도 급하게 움직이지 않는 것이 밀림 보행의 기초다. 빽빽한 수풀 속에선 누가 어디에 있는지, 저 나무 뒤에선 무엇이 나타날지 당최 알 수 없는 건 모든 동물이 마찬가지. 최대한 인기척을 내지 않고 조심스럽게 걸어야 예기치 않은 만남의 확률을 높인다. 코너를 도는 순간 나와 다름없는 주체(主體)를 만날지도 모른다. 나처럼 주관을 갖고 환경에 반응하며, 누군가에게 ‘상대방’이 되어줄 수 있는 생명체. 그도 나 못지않게 고독함을 벗 삼으며 이 길을 터벅터벅 혼자서 걸었을 것이다. 화들짝. 대개 이런 만남의 사건은 한쪽이 줄행랑을 침으로써 삽시간에 증발해버린다. 그러나 때때로 순간은 연장된다. 서로는 서로의 속내를 가늠하지 못하는 양방향의 응시 속에서 잠시 동작을 멈춘다. 그러고는 제 가던 길을 재촉한다. 이것이 야생 동물과의 만남이다.

온대림에서나 볼 법한 노란 햇살이 나무 사이로 길게 몸을 뉘었고, 갑자기 인 산들바람은 한 뭉치의 벌레 떼를 데리고 어디론가 달아나버렸다. 몇 달 전에 일어난 산사태로 북쪽 면의 나무들이 몽땅 쓰러지면서 경치가 시원하게 트였다. 아래쪽의 질퍽한 늪지대와는 달리 그곳이 내려다보이는 이 등성이는 늘 건조한 편이었고, 그래서 이 찜통 같은 열대우림의 마수로부터 잠시 벗어난 해방감을 느낄 수 있었다. 이 근방에서 표범의 발자국이 자주 발견되어서인지 여기에 올 때마다 늘 그 숭고한 야수와의 대면을 상상했다. 잡아먹혀도 좋으니 이 숲의 무대에서 조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도도한 그들은 우리의 목숨 따위에도 큰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우리 편하라고 잡아 가두고서
쳐다보는 것은 만남이 아니다
강요된 스킨십에 불과하다
자유 만끽하는 동물 찾아가
우연히 만나야 진짜 만남이다

스리랑카의 뱀, 바퀴벌레
덴마크에서 만난 죽은 동물
아마존 탐험에서 본 두꺼비…
동물들과 세계 곳곳에서 가진
소소한 만남이 정말 고맙다

야생에서 맹수를 직접 보았다는 연구자들의 경험담을 들어보면, 보통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곧 재미없다는 듯 유유히 사라진다고 한다. 그래, 바랄 걸 바라야지. 밀림의 황제 격인 최상위 포식자와의 독대를 바라는 야무진 꿈은 일찍이 접는 것이 상책이다. 그 정도의 기가 막힌 행운을 누린 적은 없지만, 나에겐 세계 각지에서 가진 크고 작은 동물들과의 소소한 만남이 한 아름 있다. 어느 하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는 소중한 순간들로, 내 마음의 야생 앨범에 고이고이 간직해놓고서 필요할 때 한 번씩 꺼내본다. 정작 동물 자신들은 전혀 마음에 두고 있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잘 안다. 채 1초도 안 되는 만남이었다 할지라도 지금의 나를 구성하는 일부분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때 내 앞을 지나가줘서.

동물이 거주하는 그들의 자택으로 직접 찾아가 뵙는 것이 자연에 대한 예의다. 우리 편하라고 잡아 가두고서 쳐다보는 것은 만남이 아니다. 스스럼없이 자유를 만끽하는 동물과 우연히 마주할 때에만 그것이 진정한 만남으로서 유효하다. 또한 그 만남은 언제나 거리를 둔 관계여야 한다. 총알이나 낚싯바늘, 올가미 등의 무기류가 동원된 일체의 ‘교제행위’는 강요된 스킨십에 불과하다. 오직 쌍안경과 같은 렌즈만으로 그 거리를 극복함으로써 컴포트존(comfort zone)을 침범하는 결례는 범하지 말아야 한다. 입산금지 지역 등은 당연히 들어가는 것을 삼가서 거주민들의 프라이버시를 존중해드리고, 설사 그들을 알현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하등의 불만을 갖지 말자. 관광객 상대하는 것 말고도 할 일이 많으신 분들이다. 생태적 사고의 가장 기본에 충실하게, 그곳엔 발자국 외에는 아무것도 남기지 말자. 가지고 돌아오는 것도 오직 기억뿐. 만남을 통해 그분들을 닮아가자.

스리랑카의 한 지붕 동물 가족

어렸을 때부터 여러 가지 생태적 환경에 노출되었던 것은 내가 누린 가장 큰 행운 중 하나였다. 결벽적인 위생 개념이나 괜한 거부감이 형성되기 전의 시절에 접하는 자연은 제아무리 길들여지지 않은 것이라도 온화하고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적도 부근에 위치한 섬나라답게 스리랑카는 열대의 온습한 기후를 어린 나에게 본격적으로 선사해줬고, 그 덕분에 커서도 이 환경에 대한 향수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때 나는 동물을 만나기 위해서 집의 테두리를 벗어날 필요도 없었다. 가령 부엌 창틀에 줄지어 대기하는 까마귀들은 사람이 등만 돌리면 음식을 낚아채 가곤 했다. 어떤 때는 하늘이 까매질 정도로 녀석들이 한꺼번에 날아올랐는데, 속설에 의하면 동료 중 한 마리가 죽어서 치르는 집단 장례식이라 했다. 야자, 바나나, 파파야 등 과실나무에 둘러싸인 집에서 살았기에 일상이 모험이 되었다. 한번은 커다란 녹색 앵무새가 집 안으로 야단스럽게 날아들었고, 열매를 수확하러 간 구아버 나무에서는 마카크 원숭이가 가장 크고 달콤해 보이는 것을 따서 이미 맛있게 먹고 있었다. 쫓아내려 하자 도리어 화를 내던 모습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아, 이게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던 건 단지 우리 생각이었을지도 모르는구나.

대체 무슨 이유인지 화장실 변기 옆에 똬리를 튼 뱀을 발견하고 누군가가 소스라치게 뛰쳐나와 집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 적도 있다. 바퀴벌레는 왜 그리도 큰지, 외계 병정처럼 날아와 착지하는 모습에 카리스마마저 느껴졌다. 책을 보다 좀 가려워 옷을 들추자 바퀴벌레 두 마리가 떡하니 내 배 위에서 쉬고 있던 광경은 지금도 뇌리에 선명하다. 물론 난 그놈들을 쫓아냈다. 다만 엄청난 사건인 양 호들갑을 떨지도 않았고, 그 덕에 짐승을 미워하게 되지도 않았다. 보라! 오히려 그 ‘징그러운 녀석들’과의 만남에 동물들과 더 가까워지지 않았는가?

덴마크의 정원 이웃들

북구의 싸한 기후대와 어울리는 높다란 침엽수가 경건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정원이 우리 집 뒷문으로 나가면 펼쳐져 있었다. 당시에 무척 크게 느껴졌던 그 공간은 나중에 다시 찾아가 보니 정말 얼마 되지 않았다. 하지만 인접한 집마다 녹지를 구비하고 있고 또 수풀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게 놔두는 정원 가꾸기 문화 덕분에 이곳은 많은 동물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구부려서 풀을 뒤지면 벌레와 지렁이를 쉽게 찾을 수 있을 정도로 비옥한 땅이었는데, 재미있는 것은 심심치 않게 현관문에 죽은 동물이 놓이는 현상이었다. 제 발로 걸어와 그곳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었는지, 어떤 희한한 취미의 요정이 나를 위해 동물들을 배달해준 것인지 나는 아리송했다.

하지만 그 덕에 아침에 문고리를 돌릴 때마다 나는 숨을 죽였다. 작은 새, 들쥐, 거미, 풍뎅이 등이 현관 매트에 놓여 있는 날이면 고이 들고 가 뒤의 침엽수 밑에 묻어주었다. 엄숙한 묵념의 시간을 갖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겨울이 되면 이 정원은 더욱 빛을 발했다. 솔방울마다 눈이 송이송이 내린 소나무 가지 위에 앉은 붉은색 다람쥐. 이 조합만큼 생태미학적으로 완벽한 것이 있을까, 나는 오래전부터 이 광경을 보며 생각하곤 했다. 머지않아 그만큼 멋진 장면이 연출되었다. 우리는 여름에 잡초를 제거하던 중 여우 굴을 발견했고, 여전히 사용되는지를 알기 위해 먹다 남은 닭 껍질을 근처에 놔두었다.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고기는 사라졌고 우리는 뛸 듯이 흥분했다. 겨울철에 근황이 궁금하던 차 어느 날 눈 위에 발자국이 발견됐다. 여우의 것을 쭉 따라가자, 다른 편에서 오던 새 발자국이랑 한 지점에서 겹쳤고, 거기서부터는 여우의 발자국만이 총총총 이어졌다. 우리는 거의 까무러칠 지경이었다.

며칠 후, 나는 거실에서 창문을 통해 정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휙 불며 소형 눈보라를 일으켰다. 마법과 같이 여우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나는 그를, 그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개를 갸우뚱거려본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불현듯 여우는 없어졌다. 하지만 내 마음에선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페루의 아마존 정글여행

야생 동물에게 로망을 가진 사람치고 아마존을 동경하지 않는 이는 없다. 남미 국가 중 브라질 다음으로 아마존 열대우림의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페루. 나는 이곳에서 봉사단원으로 근무하는 동생을 보기 위해 방문했다. 행선지는 두말할 것 없이 페루 아마존강 유역의 수도라 일컬어지는 이키토스(Iquitos)였다. 울창한 삼림과 콸콸 흐르는 강으로 둘러싸인 이 도시는 육로로는 거의 접근할 수 없어 오직 배나 비행기로만 닿을 수 있다. 접근성의 차단이 자연을 지켜준다는 명제를 다시 한 번 실감하게 해주는 곳이다.

오랫동안 기대하던 일이 막상 눈앞에서 벌어질 때에는 늘 어떤 몽롱함이 수반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떤 지류에서 출발해서 아마존의 본류에 도달하던 순간을 나는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본류와 지류가 만나는 곳은 희한하게도 황토색과 검은색 물의 경계가 분명했다. 우리를 태운 쾌속선은 이 민물의 바다를 내달려 마침내 숲 속에 텐트가 마련된 섬에 도착했다.
봉사단원으로 근무하는 동생을 보기 위해 방문한 페루 아마존강 유역의 이키토스. 아래 사진은 카누를 타고 정글 탐험 중인 필자. 김산하 제공
무심코 뭍에 발을 내디디려다 찰나에 피하고 말았다. 조그만 잎 쪼가리를 든 가위개미들이 일렬종대로 길을 건너고 있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자랑스럽다는 듯이 위로 치켜들며 걷는 그 녹색 전리품들의 행진이란! 책에서 보는 것과 정확히 똑같음에 나는 어리벙벙해하며 숲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순간도 낭비할 수 없기에 우리는 짐을 풀자마자 곧장 정글 탐험에 나섰다. 그리 멀리 갈 필요는 없었다. 텐트 뒤에는 멋쟁이새(weaver bird)가 풀로 정교하게 만든 둥지로 한 나무가 다 덮여 있었다. 그 밑으로 대형 모니터도마뱀이 춤추듯 다리를 놀리며 풀숲을 헤치고, 카푸친원숭이는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며 나무의 수관부로 몸을 피했다. 진짜 하이라이트는 저녁때 찾아왔다. 야간 탐험에 나서기로 한 것이다. 그토록 부산스런 밀림은 그 어디도 다시 가보지 못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새카만 어둠 속을 전등 하나에 의지해서 겨우 걷고 있었지만, 주변에서는 계속해서 뭔가가 움직이고, 스쳐 지나가고, 꼼지락거렸다.

갑자기 거의 바위만한 두꺼비가 길을 막고 앉아 있었다. 조용히 타일러도, 나뭇가지로 살짝 건드려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도사 같은 이 밀림의 정령을 우리는 조용히 돌아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검은 비단결의 강물에 우리는 카누를 띄웠다. 침묵 속에 얼마나 흘러갔을까. 사방에서 상상해본 적이 없는 소리의 향연이 시작되었다. 마치 테크노 음악을 방불케 하는 기묘한 음질의 노래가 수천 개의 작은 입으로부터 나오고 있었다. 카누 밖으로 몸을 굽혀 보았다. 샛노란 색의 개구리가 손전등의 스포트라이트 아래에 영롱하게 등장했다. 가이드가 조심하라는 한마디를 외친다. 나는 전등을 좀 더 멀리 비춰 보았다. 카이만(악어의 일종)의 두 눈이 빛을 반사해주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이 아름다운 교향곡에 소음을 보탤 순 없었다. 물론 공포가 아니라, 깊은 기쁨의 소리였다.

인도의 호랑이 탐험

전세계에 파편적으로 흩어진 개체를 모두 모아야 채 4000마리가 되지 않는 호랑이. 이 위대한 동물이 사라지게끔 놔둔 나라의 시민으로서 나는 거의 성지순례자와 같은 마음으로 호랑이의 왕국에 문을 두드렸다. 내가 찾은 코벳 국립공원은 히말라야 자락에 위치한 곳으로서 인도의 가장 오래된 국립공원이다. 지프차를 타고 들어가기 전, 나는 잠시 수풀 속으로 걸어 들어가 봤다. 커다란 영양의 한 종류인 닐가이가 조용히 시선을 피해 몸을 숨겼다. 조금 더 걷자 긴꼬리 마카크 원숭이 한 가족이 요란스럽게 낙엽 회오리를 일으키며 어디론가 단체 여행을 떠났다. 강변의 부드러운 모래에 뭔가가 눈에 띄었다. 커다란 호랑이 발자국이었다. 그 옆에는 사슴의 턱뼈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느낌이 좋았다. 오늘은 뭔가 벌어질 날이었다.

곧 지프차는 덜커덩거리며 아름답게 뒤틀린 바니안트리(벵골보리수) 아래를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나무 위에는 하누만 랑구르 원숭이, 나무 아래에는 삼바 사슴이 차의 이동을 눈으로 따라갔다. 호랑이를 경계하기 위해 흔히 함께 노닌다는 설명이다. 거대 맹수의 숨결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가이드는 한 3미터 높이의 나무에 난 할퀸 자국을 가리킨다. 몸을 쭉 뻗어 영역표시를 한 거란다. 저 정도면 나 같은 것은 그냥 한 방에…. 하지만 출입이 허용된 곳을 빙빙 돌아도 호랑이는 우리 앞에 등장해주지 않았다. 대신 야생 공작이 인도의 미를 한 몸으로 형상화한 것인 양 숲 속을 고고히 거닐었다. 사람을 포함한 이곳의 모든 생물은 호랑이의 존재감 속에서 고개를 돌리고, 공기를 맡고, 눈을 깜빡였다. 나는 그것으로 됐다. 충분했다. 호랑이의 상을 내 망막에 포착시켜야 한다는 욕심은 버렸다. 내 눈앞에 없어도, 내 기억 속에 없어도, 그저 호랑이가 이 세상에 오래오래 있어주기만을 나는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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