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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명 풀꽃평화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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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풀꽃평화연구소 대표 정상명
아이 방에 불이 났다. 놀라서 달려간 어미가 방문을 열었을 때 방안은 이미 주황색 화염으로 꽉 차 있었다. 1998년 12월8일 새벽 한 시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소방차가 아홉 대나 달려왔지만, 서울 충정로의 좁은 골목길에 진입조차 하지 못했다. 소방차가 들어오려면 진즉에 길을 넓혔어야 하는데, 이웃의 안전보다는 내 땅 한 뼘에 더 목을 매는 세상이었다. 스물세 살 딸아이가 불길 속에서 죽어가는 것을, 어미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봤다. 세상에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고문이었다.
석 달 뒤, 어머니는 딸 초영(草英)의 이름을 따서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을 만들었다. 단순한 추도모임이 아니었다. 시민운동에 문외한이던 어머니는 절멸의 위기에 처한 동식물을 보호하고, 훼손된 자연경관과 마을공동체를 되살리는 일에 발 벗고 나섰다. 사재를 출연해서 ‘풀꽃평화연구소’를 세우고 동강댐과 새만금, 4대강 공사 현장까지 빠지지 않고 쫓아다녔다. 그러기를 17년째. 2009년 그가 펴낸 에세이집 <꽃짐> 표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장 고통스러운 짐이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되었습니다.”
초영이 엄마 정상명(66)은 화가이자 작가이다. 수도여자사범대학(세종대 전신) 국문과를 졸업한 뒤 교사 생활을 하다가 결혼해 천초영과 천샘, 두 딸을 낳았고 38살 만학도로 홍익대 대학원에 입학해 미술을 공부했다. 1988년부터 10년간 젊은 화가들을 지원하는 비상업용 화랑인 녹색갤러리를 운영했고, 1998년 사고 이후에는 자연과 더불어 사는 “풀꽃운동”을 벌여왔다.
듣고 싶었다. 창자가 끊어질 듯한 참척(慘慽)의 고통 속에서 그는 어떻게 환경운동에 뛰어들 생각을 했는지. 그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짐”은 어떻게 “가장 아름다운 꽃”이 될 수 있었는지. 사랑하는 이의 죽음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의 삶은 어떻게 이어져야 하는지. 삶과 죽음, 사랑과 고통의 뫼비우스 띠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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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한다는 정상명 풀꽃평화연구소 대표에겐 주변을 따뜻하고 밝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가 15년 전 숨진 딸에 대해 얘기할 땐 목소리가 한결 차분해졌고 내면 깊은 곳의 감정이 표정으로 드러났다. 사진은 지난 4일 강원도 춘천시 서면 서상리 툇골의 풀꽃평화연구소에서 찍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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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차가 못 올라가는 집에서
화마에 삼켜지는 딸을 지켜보며
그는 생명운동 전사가 되었다
명료한 정신으로 신과 계약했다 “산다는 건 슬픔, 유한한 인생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야지
춤추고 노래하고 살아야지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해야지
어느 것 하나 소홀하지 말아야지” “이대로는 안 산다” 딸의 주검 앞에서 약속 양지바른 마당 위로 거위 세 마리가 목을 늘이며 지나가고, 명심보감 읽은 선비처럼 품행이 반듯한 진돗개 ‘명심이’가 앞다리를 쭉 뻗으며 기지개를 켰다. 정상명의 거처는 연구소 아래채다. 일주일에 나흘은 이곳 툇골 집에서, 사흘은 서울에서 보낸다. 고즈넉한 그의 집 성모마리아상 아래, 딸 초영이가 잠들어 있다. 낮게 누운 비석에는 “풀꽃세상을 위한 모임으로 다시 태어난 초영이, 이곳에서 쉬다”라고 씌어 있다. -따님의 죽음 이후로 환경운동을 시작하셨다. 어떤 심정이셨나? “나는… ‘전사’(戰士)였다. 생명운동을 펼쳐가는 전사! 우리 아이 죽음의 현장에서 전사가 돼버렸다. 그날, 소방차도 못 올라오고 집 밖 계단에서 내 아이의 방을 보는데, 화염에 휩싸여 그 방 유리창이 허공으로 막 터져나가는 거다. 정신이 번쩍 났다. ‘주님, 지금 내 아이가 거기로 올라가고 있어요. 당신이 저 손을 빨리 잡아주세요. 얼른 안아주세요. 그러면 제가 나머지 생을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밝히는 데 쓰겠습니다’라고, 내가 영혼을 걸고 신 앞에 ‘계약’했다. 흥분하고 울고불고한 게 아니라 정신이 확 들면서 지극히 명료한 정신으로 ‘내 갈 길이 뭔가’를 그 순간 생각했다. 내 아이가 떠나는 그곳, ‘그분’ 앞에 대고 내가 계약을 한 거다.” 또박또박 천천히 그녀가 말을 이었다. 천만번도 넘게 그 상황을 되씹고 되짚어 본 듯, 그의 목소리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그래도 잊지 못할 가장 쓰라린 기억은, 불길이 잦아든 뒤 재가 된 초영이를 마주했을 때다. “그 아이 머리가 원래 갈색이다. 걔는 이렇게 안으면(안는 흉내) 몸에서 꽃잎 같은, 장미꽃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나고 살이 되게 부드러웠다. 그게 기분 좋아서 일부러 걔를 자주 안곤 했는데. 그날 들것에 실려 나오는 아이를 보고 ‘초영아!’ 하고 달려가서 안으니… 아이가 딱딱한 거다. 난 죽어도, 그 딱딱한 감촉을 못 잊을 거다.” 오후의 햇볕이 깊숙이 마루를 비추면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탁자 위 사진 속의 초영이가 상큼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러곤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없다. 다음 기억나는 장면은 애 아빠가 병원 영안실에 초영이를 보러 가자고 할 때인데, 엄마인 내가 들고 갈 게 하나도 없는 거다. 화분의 흰 난초를 한 송이 잘라서 그걸 딱딱한 애 옆에 놓고 왔다. 그리고 결심했다. ‘내가 이대로는 안 산다!’ 남한테 딱히 해 끼치고 산 건 아니었지만 이 세상을 밝히는 데 적극적으로 뛰어든 것도 아니었으니까…. 산다는 건 슬픔이다. 우린 어차피 유한한 생에 떠 있는 작은 존재고 먼저 가든 나중 가든 언젠가 이생을 떠난다. 그러니 어떻게 살 것인가. 그러니까 행복하게 살아야지. 춤추고 노래하고 살아야지. 삶을 전면적으로 긍정해야지. 이 세상 모든 것을 경탄과 경이로 바라보고 어느 것 하나 소홀히 보지 말아야지.” -동물이든 식물이든 사람이든…. “그렇다. 돌이켜보니까 난 그간 제대로 본 게 하나도 없더라. 사람 얼굴도 제대로 안 보고. 내가 우리 둘째 올케랑 굉장히 친한데 30~40년을 보고 살면서 그 사람 여기에(얼굴 가리키며) 엄청나게 큰 점이 있다는 것도 몰랐다. 사람도 꽃도 정확하게 안 봤고, 그냥 꽃 덩어리, 덩어리째로 본 거다. 세밀하게 본 적 없이. 뭐든 자세히 관찰하며 보게 되니 세상에 감사할 게 참 많더라.” 생명과 자연의 섬세한 움직임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경탄하고 감사하면서 그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되어 갔다. 삐뽀새, 호호새, 흙담새… 가까이서 자주 보는 산새들에 이름을 붙이고, 들꽃에 말을 걸고, 키우던 거위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사를 쓰면서, 생명들을 짓이기는 막개발과 원자력발전소에 맞서 싸웠다. 정상명에게 풀꽃운동은 남을 위한 헌신과 봉사가 아니라, 그 자신의 영혼을 위한 기쁨의 시간이었다. 나무의 얼음세포처럼 봄을 준비한다 -작년 봄 세월호 사고 장면을 보면서 우리 모두 큰 충격과 비탄에 잠겼지만, 당신은 특히 남다른 심경이었을 것 같다. “하나는 불이었고 하나는 물이었지. 하나는 개인적이고 하나는 집단적이었을 뿐, 나머지는 많이 닮았더라. 애들은 갇혀서 못 나오고….” 공교롭게도 세월호 참사 당일, 연구소 식구들도 제주도로 워크숍을 겸한 여행을 떠났다. 공항에서 사고 소식을 들었다. -세월호 사고로 과거의 아픈 상처가 다시 떠올랐을 듯하다. “나는 이미 상처가 내 몸 곳곳으로 흘러들어서 몸하고 하나가 된 것 같다. 어느 부분이 상처고 어디가 아닌지 딱 구별되지 않는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 본 적 있으신가? “나는 못 만났고 우리 둘째가… 현대무용을 하는 무용수고 안무가인데, 이번에 세월호 1주기 기념공연을 한다고 지난 6개월 동안 독서모임도 만들고 워크숍도 하면서 준비를 해왔다. 엊그제도 팽목항에 가서 엄청 울고 왔다고 하더라.” 두 살 터울의 작은딸 샘이에게도 언니의 죽음은 청천벽력이었다. 미시간대에서 문학과 미술을 복수 전공했지만 언니를 잃은 뒤 “인생에서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들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어머니가 벌이는 풀꽃운동의 충실한 조수 역할을 하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다시 입학해서 춤을 배웠다. 세월호 1주기에 맞춰, 샘이는 ‘팽목의 자장가’라는 제목으로 공연을 할 계획이다.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있나? “나무에 얼음세포라고 불리는, 다른 세포보다 수천배 큰 얼음주머니가 있다고 한다. 여기 얼음물을 품어서 겨울에 다른 세포들이 얼어 죽지 않게 단열과 보온 역할을 하는 거다. 그리고 봄이 오면 얼음세포의 얼음을 녹여서 가지 끝, 뿌리 끝, 잎사귀 곳곳에 수분을 공급한다. 우리도, 세월호 분들도 마찬가지다. 다들 고통으로 인해서 마음속에 얼음세포 하나씩 갖게 되었다. 이 얼음세포가 우리를 얼어 죽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거꾸로 다른 세포들을, 우리 삶을, 우리가 아침에 밥 먹고 잠잘 때까지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위로하고 덮어주는 그런 역할을 하도록 했으면 좋겠다. 날이 풀리고 마음이 풀리고 어떤 슬픔이 녹아내려갔을 때 그간 간직해온 얼음세포가 우리 삶에 부드럽게 스며들어서 다시금 이 삶이 꽃피고 열매 맺고 그런 삶의 원동력이 됐으면 좋겠다. 이 얼음세포는 바로 죽은 내 아이니까. 걔를 살려 내야지. 슬픔에, 고통에 그냥 널브러지면 안 된다. 엎어져도 안 된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에서 신부님이 가슴에 십자가를 딱 품고 원주민과 함께 걸어가듯이, 나도 내 가슴에 초영이를 딱 품고 걷는다고 생각한다. 십자가처럼 부처님처럼 자기 인생의 중심에 딱 넣고. 그게 나를 견디게 하는 엄청난 힘이 된 것 같다. 그 아이를 생각하면서 아이가 원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작은 힘이 된다면 작은 힘도 보태면 좋고. 이런 말이 (유가족들에게) 무슨 힘이 될까 싶지만….” -예전 어느 인터뷰에서 “딸을 빼앗아간 세상에 대해 악보다 더 강한 선과 사랑으로 복수하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선과 사랑으로 하는 복수”란 뭔가? “내 안에 분명 좋은 것과 나쁜 것, 선과 악이 있는데 선한 걸 끄집어내서 퍼뜨리면 사람들도 그것에 감염이 된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리는 그걸 주변에 감염시킬 수 있는 존재들이니까. 내 안의 좋은 것, 사랑을 자꾸 꺼내서 사람들에게 감염을 시키는 게, 우리가 병든 세상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복수가 아닐까.” 대보름을 앞두고 달빛이 밝았다. 늙은 유기견 ‘열무’를 코트 안에 품은 채 그가 대문간에 서서 오래도록 우리를 배웅했다. 꽃샘바람이 매워도, 나무 속 얼음세포가 봄맞이 채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니 헐벗은 들판이 쓸쓸하지만은 않았다. 봄이 오고 있다.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 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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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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