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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인터뷰 날이었던 지난달 24일 오후 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가 서울 대학로 학전 소극장 내 관객석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김 대표는 “어색해 미치겠으니 빨리 끝내 달라”며 사진기자를 독촉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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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아침이슬 그 사람’ 김민기 (하)
학전이 세 든 건물 4층에 위치한 김민기의 사무실은 극단 대표의 집무실이라기보다는 은거하는 수도자의 토굴 같았다. 91년 학전 개관 때부터 지금까지 그가 기획하고 제작한 각종 공연물 자료와 참고서적이 사람 하나 겨우 지나다닐 만한 통로만 남겨두고 천장까지 가득 찼다. 높다란 책장이 창을 가려 볕도 제대로 들지 않는 안쪽 구석, 두어 평 남짓한 공간에 그의 책상과 컴퓨터, 간이침대가 놓여 있었다. 1985년 아동극 준비 과정에서 만난 이미영과 결혼한 뒤, 슬하에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는 주말에도 사무실에 틀어박혀 지낼 때가 많다고 했다. 가정적인 아빠는 못 될 것 같은데 학전 안에서는 ‘아들 바보’로 소문이 나있다고, 곁에 있던 직원 하나가 귀띔을 해준다. 아버지의 미술적 재능을 물려받은 덕일까? 아들 둘 모두 건축과 디자인을 전공해서 대학 졸업 뒤 디자인회사를 차리더니 요즘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닌다”고 말하는 김민기의 말투에도 은근한 아들 자랑이 묻어난다. 비좁은 공간에 어지럽게 놓인 물건들을 대충 치우고 앉을 자리를 만들어 김민기와의 2차 인터뷰를 시작했다.
중정에서 원하는 노래 안 만들어 영창으로
-사무실에 기타가 안 보인다. 기타 안 치시나?
“미쳤어?”
그가 짐짓 퉁명스럽게 질문을 걷어냈다. 다시 둘러보아도 기타나 키보드 같은 건 눈에 띄지 않는다.
-기타도 없고, 노래도 안 만드시고….
“학전 열고 지금까지 해온 (뮤지컬 번안곡) 작업들이 다 노래하고 관련된 건데 뭐.”
-왜 대중가요는 더 이상 만들지도, 부르지도 않으시나? 다방 같은 데서라도 당신 노래가 나오면 진저리를 치며 뛰쳐나간다는 일화가 있던데. 노래 때문에 겪은 고초 때문인가?
“그건 아니다. 난 내 노래를 듣기 싫은 게, 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단 말이야.”
-당신 노래로 청춘을 보냈던 사람들에겐 각별한 추억이 담긴 곡들이다.
“다시 ‘쟁이’ 얘길 하지 않을 수 없는데 쟁이는 어제 했던 작업을 부정해야 해. 안 그러면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꼭 그래야 하나? 화가 중에도 물방울이나 꽃 그림만 연작으로 그리는 사람이 있고, 판소리 오래 하시는 분 중에도 주요 레퍼토리가 하나로 정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분도 있지만 난 그런 데 익숙해지고 싶지가 않아. 계속 더 찾아보고 싶어, 새로운 걸.”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오신 것 아닌가? 새로운 걸 찾아다니는?
“그렇게 살았지.”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내며 살아온 인생이었다. 통기타 싱어송 라이터로 음악을 시작했지만 71년 이후 김지하, 임진택, 채희완, 김영동, 이애주, 김석만 등을 만나면서 판소리와 전통연희의 형식을 되살려 마당극의 효시가 된 <소리굿 아구>(1974. 대본 김민기)를 만들었고 78년에는 <노래굿 공장의 불빛>을 작곡, 제작했다. 90년에는 상업적 음악유통망에서 소외되어 있던 한민족의 노래를 대대적으로 발굴 수집하는 <겨레의 노래>(주최 한겨레신문) 사업을 감독했고 91년 학전 설립 이후에는 록 오페라, 록 뮤지컬 등 다양한 공연 형식을 선보였다.
음악적인 실험보다 더욱 파격적인 것은 그의 삶이었다. ‘아침이슬’과 ‘상록수’가 저항가요의 상징이 된 것은 그걸 지은 사람이 김민기였기 때문이고, 김민기 스스로 “비바람 맞고 눈보라 쳐도 깨치고 나가”는 삶이 무언지 보여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72년 그의 앨범이 압수되고 그의 노래가 금지되었을 때 김민기의 나이 고작 이십대 초반, 아직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을 때였다. 그는 여전히 젊은이들의 우상이었고 그의 통기타 친구들은 주류 문화계로 발돋움하고 있었다. 기타 치고 노래하던 “미대 형”이 선택한 길은 그러나 무대도, 화단(畵壇)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이었다.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김민기는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71년에 음반을 낼 때는 전업가수가 될 수도 있다 생각한 것 아닌가?
“뭔지도 모르고 그냥 닥치는 대로 다 하려고 했어. 근데 그 71년 판이 압수되면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진 거야. 아무것도 할 수가 없게 된 거지.”
-학벌 좋고 인맥 좋아서 원한다면 얼마든지 소시민적으로 살 수 있는 조건이었을 텐데.
“소시민적으로 살았지.”
-교사자격증도 있었지 않나? 정보기관에 찍혀서 취직이 어렵다 해도 미술학원 강사나 반주자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그 길을 택하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이런 노래 만들어라’ 했을 때 내가 응했다면 아마 전혀 다른 길로 풀렸을 거야. 당시에 난 제법 유명한 놈이었으니까. 군대에 있을 때 그런 경험이 있다.”
74년 카투사로 입대한 그가 처음 배치된 곳은 미군방송국(AFKN)이었다. 비교적 편안한 군 생활을 하던 75년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보안부대에 소환되어 중앙정보부 요원을 만나게 된다. 중정의 학원 담당이라는 자가 그에게 지시한 것은 “노래를 만들라”는 것이었다. “노래를 만들면 편안하게 해준다. 지금 제대를 시켜 줄 수도 있다”면서. 김민기의 음반을 압수하고 금지하는 것만으로는 유신 반대 집회마다 그의 노래가 불리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되자, 김민기 자체를 권력 편으로 ‘압수’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그때 김민기가 지은 노래가 ‘식구생각’이다.
분홍빛 새털구름 하하 고운데/ 학교 나간 울 오빠 송아지 타고 저기 오네/ 읍내 나가신 아빠는 왜 안 오실까?/ 엄마는 문만 빼꼼 열고 밥 지을라 내다보실라.(‘식구생각’, 1975년 작)
-중정요원이 황당했겠다!
“군대에 있는데 내가 뭐 거부를 할 수 있나? 만들라 하니 만든 거지. 근데 아무리 걔들이 요구해도 내 속에서 나오는 게 그거밖에 안 되는데 어쩌라고?”
김민기는 곧바로 사단 영창에 보내졌고 최전방부대로 재배치되었다. 77년 만기 제대한 김민기가 취직한 곳은 부평의 한 봉제 공장이었다. 동료노동자들의 합동결혼식 축가로 ‘상록수’를 작곡한 것도 그때였고, 78년 발표된 노래굿 ‘공장의 불빛’의 바탕이 된 것도 그때의 노동현장 경험이었다. 세간에는 ‘공장의 불빛’이 동일방직사건(파업 노조원에게 똥물을 투척)을 극화한 것이라고 잘못 알려져 있지만, 극 중에 묘사된 철야작업과 구사대, 노조탄압은 당시 어느 공장에서나 볼 수 있는 일반적 노동현실이었다고 그는 말한다.
‘공장의 불빛’ 테이프를 배포할 때 김민기는 투옥될 각오를 하고 있었다. 78년 양희은의 음반에 ‘늙은 군인의 노래’나 ‘상록수’를 실을 때, 심의 통과를 위해 작곡가 이름으로 김아영이란 가명을 사용했던 그가 이번에는 카세트테이프에 보란 듯이 김민기 이름을 새겨 넣었다.
세월호 얘기 무지 하고 싶지만같이 살든가 같이 죽든가 아니면
함부로 묘사할 수 없다고 생각
누군가 세월호 영화 주제가 요청
고등학교 때 만든 ‘친구’ 쓰라 해 20대 중후반부터 30대 초반까지
공장 노동자로, 건설현장 노가다로
탄광 광부로, 농사꾼으로 살았다
세상 낮은 곳에 몸을 수그린 채
그는 무엇을 찾아 헤맸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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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기 극단 학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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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학전 사무실 한편의 풍경. 김민기 대표가 사용하는 책상과 책상 밑에 이동식으로 마련된 침대가 놓여 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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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입다 벗어놓은 내복 같아요
다시 ‘쟁이’ 얘길 하자면
쟁이는 어제의 작업 부정해야 해
안 그럼 새로운 걸 할 수가 없어” “‘쉼표’가 아니라 ‘숨표’야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1/16은 15/16랑 등가라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야
아, 근데 말이 길다, 취했네” 무명 무실 무감한 인생, 지녀볼래 세월이 흘렀다. 김민기의 ‘상록수’는 아이엠에프(IMF) 공익광고에서 박세리의 우승 장면을 빛내주는 배경음악이 되었고, ‘늙은 군인의 노래’는 정주영 회장이 소떼를 몰고 방북하던 방송 장면에 깔렸으며, ‘내 나라 내 겨레’는 김대중 대통령의 취임식에서 불렸다.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직접 기타를 치며 ‘상록수’를 불렀고, 같은 노래가 2009년 시청 앞 노제에서 양희은의 노래로 그의 영전에 헌사 되었다. 김민기와 함께했던 통기타 가수들은 중간중간 제2의 전성기를 누리면서 쎄시봉의 추억담을 전해 줬고, 그와 함께 문화운동을 했던 이들 중 다수는 정계에서 대학에서 각종 문화예술단체에서 두각을 드러내며 이름을 알렸다. 하의도 밤바다의 밀물과 썰물처럼 세상이 들고 남을 거듭하는 중에도 김민기는 그저 울렁이는 쪽배에 올라 보름달을 기다리는 어부처럼 한결같았다. 그는 완벽한 사람이 아니다. 인생의 굽이굽이 데고 찔린 자국이 흠집으로 남아서 오래된 고향집 흙집처럼 파이고 쓸렸다. 그래도 한참을 잊고 달리다 돌아본 자리, 거기 그대로 한 사람이 서 있다는 건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그와의 긴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 되었다. -살면서 주변 사람들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나? “그런 거 없어. 날 고문한 놈들한테 내가 미안하다 생각 들었던 것, 그게 분기점이었던 것 같애. 뭐, 함께하자고 했던 친구들이 하나둘 대학으로, 정계로 떠나갈 때는 좀 선선하긴 했지. 나 혼자 남겨놓고 월급 받으러 가는구나 싶어서….(웃음)”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뭔가? “요즘은 안 보고 산 지 좀 되었지만 4년 전인가 (김)지하 형이 박경리씨 <토지>를 뮤지컬로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해온 적이 있어. 그런데 이 소설은 희곡이 아니기 때문에 대사가 적단 말이야. 상황 묘사가 대부분인데 그걸 다른 장르로 넘기는 순간 그 작가의 필력은 다 사라져 버리는 거야. 그래서 생각한 것이 ‘오디오북’인데, 원작을 가장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다른 장르로 옮길 수 있는 방법이지.” -그 뒤로 진척이 없나? “더 진행하지 못했는데. 이거 할 수 있는 데가 학전밖에는 없거든. 토지에 등장하는 인물이 600명이 넘는데. 비록 학전이 남의 집에 세 들어 언제 쫓겨날지 알 수 없는 신세지만 그동안 돈 안 되는 거 알면서 같이 일해 왔던 친구들이 있으니까. 그리고 최상일이라고 십년 넘게 노동요를 채집해온 사람이 있는데, 그 노래들을 거기 집어넣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있지. 그렇게 박경리의 <토지>, 그리고 거기에 홍명희의 <임꺽정>까지 같은 방식으로….” -그런 대작을 하려면 돈이 있어야 할 텐데. “학전 초기에 더러 친구들이 굉장히 진화된 방법인 양 ‘주식회사를 왜 안 만드냐?’고 그러던데, 주식회사를 만들면 주주들한테 배당이 가게 작품을 만들어야 하니까 그렇게는 하고 싶지가 않아. 다른 방법은 후원회를 활성화시키는 건데 그걸 마구잡이로 하면… 좀 자존심 상하지. 회원 가입하면 얼마 디시해 준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모으면.” -이건 어떤가? ‘돈 안 되는 일을 아무 조건 없이 후원해 줄, 철없는 사람들’ 구함! “그거야 뭐….(웃음)” -마지막으로 덧붙이고 싶은 말씀.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 가운데 하나 바꾸고 싶은 게 있어. ‘쉼표’라는 말인데, 보통 제일 익숙한 게 4분의 4박자 네 마디의 악보인데, 대부분 그 넷째 마디 끝에 4분 쉼표가 하나 있지. 근데 이게 쉼표가 아니라 ‘숨표’라고. 내가 수영을 좋아하는데 수영하다 잠깐 올라오는 시간에 숨을 쉬는 거야. 마지막 16분의 1은 그 이전의 16분의 15를 내뱉기 위해서 들이쉬는 거거든. 쉬는 게 아니고 전체를 살리기 위한 숨표! 그러니까 16분의 1은 16분의 15랑 등가라고. 마이너리티(소수자)라고 보는데 마이너리티가 아니고. 복지가 그냥 퍼주는 게 아니란 얘기. 아, 근데 말이 길다. 내가 취했네.(웃음)” 김민기와 헤어져 돌아오는 대학로 골목에 바람이 불어 전단지가 날렸다. 지난 몇 주 내내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던 노래가 다시 입가에 맴돌았다. 한대수가 지은 곡을 그가 불러 1집에 넣은 노래. 끝 끝없는 바람/ 저 험한 산 위로 나뭇잎 사이 불어가는/ 아 자유의 바람/ 저 언덕 너머 물결같이 춤추던 님/ 무명 무실 무감한 님/ 나도 님과 같은 인생을/ 지녀볼래 지녀볼래(김민기 노래 ‘바람과 나’ 1971)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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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순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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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85444.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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