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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9일 서울 망원동 한 찻집에서 만난 손아람 작가. 그는 용산참사를 소재로 쓴, 영화화된 소설 <소수의견>을 통해 “기껏해야 50~60년짜리 안목에 불과한 법이 절대적인 기준이 아님을 얘기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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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소설가 손아람
“저는 일관되게 공모문학상의 완전폐지를 주장할 생각입니다. 동시에 공모문학상이 폐지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저 역시 문학상을 제정하여 운영하기로 했습니다. 새 문학상의 이름은 ‘세계 최고의 문학상’이며 상금은 100억원입니다. 제1회 수상작은 제 소설인 <디 마이너스>입니다…. 앞으로 제가 낼 소설의 띠지에는 빠짐없이 다음 문장이 들어갑니다. “상금 100억원, 세계 최고의 문학상 선정 작가 손아람이 돌아왔다!”(손아람의 페이스북. 2015년 7월16일)
손아람은 35살의 신예 작가다. 자신의 힙합밴드 경험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2008), 올여름 영화로 개봉된 <소수의견>(2010)에 이어, “상금 100억원의 문학상 수상작”이 된 <디 마이너스>(2015)가 그의 세 번째 작품이다. 아마도 제2회 ‘세계 최고의 문학상’ 발표는 그가 다음 작품을 출간할 때쯤이 될 것이다. 대형 문예지가 주최하는 문학상 공모가 ‘출판사-평론가-스타작가’의 담합구조를 만든다는 우울하고 불편한 얘기를 하는 중에도, 그는 능청스런 유머코드를 잃지 않는다.
손아람의 작품엔, 그의 연배를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발랄함과 묵직함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차한다. 용산참사를 떠올리게 하는 법정 드라마나 1990년대 대학가 운동권 얘기를 하는데도, 그의 소설엔 가끔씩 ‘푹~’ 실소를 터뜨리게 하는 힘이 있다. 죽음과 폭력과 취조와 배신을 얘기하는데도 그의 작품은 따뜻하고 훈훈하다. 이문구와 윤흥길과 공지영의 문학적 유전자가 조금씩 섞여 있는 것 같은 인상이다.
손아람은 1980년생이다. 나 같은 50대가 1980년 5·18 광주를 이정표 삼아 성인식을 치렀다면, 그는 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을 이정표로 성인이 된 세대다. 그의 신작 <디 마이너스>는 97년부터 2007년까지 학생운동을 했던 90년대 세대의 이상과 좌절을 그렸다. 세상은 흔히 이들을 취업난에 맞닥뜨린 ‘아이엠에프(IMF)세대’, 연애·결혼·육아를 포기한 ‘삼포세대’라고 부르지만, 그들이 삶의 좌표를 세우던 20대 청년시절에 무엇을 꿈꾸고 어떤 상흔을 가졌는지는 자세히 알지 못한다. 발랄하지만 가볍지 않고, 묵직하지만 지루한 걸 질색하는 30대 손아람을 통해서 90년대 세대의 얘기를 듣고 싶었다. 지난 19일 서울 망원동의 찻집에서 그를 만났다.
용산참사 모티브로 40일 만에 쓴 <소수의견>
-영화 <소수의견> 재미있게 봤어요. 솔직히 저도 영화 보고서 소설책을 산 독자 중 한 사람이에요. 불행하게도 윤계상 사진이 들어간 판본은 구하지 못했지만.(웃음)
“하하, 네.”
-그 영화에 카메오로도 직접 출연했다던데, 어느 대목에 나오셨는지 기억이 안 나요.
“젊은 법무부 직원으로 나왔어요. 100원 소송 할 때 ‘변호사님, 경력 낭비하지 마세요!’라고 말하는… 유해진씨가 ‘지 경력에 넣을 거라곤 토익점수밖에 없게 생긴 애가 나한테 말하더라’ 할 때 바로 그 애죠.”
-연기를 너무 잘해서 그랬나? 기억에 남을 만큼 특별히 튀지 않았어요.(웃음)
“제가 영화 각본 작업을 했는데, 제가 쓴 대본엔 없었어요. 나중에 감독님이 선물로 주신 컷이죠.”
-원작자가 영화 각색에 참여하는 경우는 흔치 않은데.
“저도 사실 빠지고 싶었어요. 각본 작업에 매달리면 최소한 몇 달, 길면 1년까지 또 그 작품에 파묻혀 있어야 하니까요. (다른 새로운 걸 해야 하는데) 여기서 못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어 그만두고 싶었지요. 근데 김성제 감독이, 이 작품에 전문적인 영역(법조계)이 많이 등장하니까 다른 작가를 붙여서 하긴 힘들다고 ‘니가 해라’ 한 달 가까이 얘길 하셔서….”
<소수의견>은 용산참사를 모티브로, 재개발지역 철거민과 경찰의 충돌 과정에서 발생한 죽음을 둘러싼 법정공방을 다루고 있다. 소설에 나오는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실제 판례와 실화를 차용해 쓴 것이다. 국가를 상대로 한 100원 소송은, 지율 스님이 <조선일보>에 대한 정정보도를 위해 제기한 10원 소송에서 영감을 받았고, 국민참여재판을 회피하기 위해 증인을 60명이나 신청하는 검찰의 꼼수도 실제 용산참사 재판에서 따온 것이다. 취재를 하는 데는 1년 가까이 걸렸지만, 머릿속 이야기를 글로 풀어내는 데는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책으로 400쪽 분량의 장편소설을 단 40일 만에 써내려갔다. 무언가에 홀린 듯, 이끌리듯 써내려간 작품이었다.
-누가 봐도 용산참사를 소재로 한 게 분명한데 왜 글머리에 “사건은 실화가 아니다. 인물은 실존하지 않는다”고 강조를 했어요? 겁났어요?
“아니요. 오히려 너무 리얼해서요. 디테일에서 실제와 다른 부분이 있는데 사람들이 이걸 다큐멘터리처럼 모두 실제 사건으로 받아들이면 안 되잖아요. 용산참사에 대한 오해를 불러일으킬까봐 쓴 말이에요.”
-국민참여재판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우리나라에선 배심원 평결이 나와도 판사가 그와 다른 판결을 내놓을 수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어요.
“예, 용산참사는 국민참여재판으로 가지 못했지만, 만약 참여재판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가상하고 썼지요.”
-영화에 나온 것처럼 실제로 국민참여재판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공판검사가 따로 있어요?
“제가 방청한 여러 개 재판에 모두 한 명의 여자 검사가 나와서 했는데요, 그 검사의 말투를 그대로 따와서 대사화한 부분도 있습니다. 배심원들한테 ‘여러분, 식사하셨습니까?’ 인사말로 시작하는 부분.”
-아, 그거요?
“그 뒤를 이어서 늘 이렇게 말해요. ‘저는 긴장이 돼서 식사를 못했네요. 왜 매번 하는 재판인데 이러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간 저도 익숙해질 날이 오겠죠?’라고.”
-생글생글 웃으면서 칼을 휘두르는 격이군요. 근데 그 여자 검사는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것 아닌가요? 세련된 외모와 매너, 부드러운 표정, 또박또박하고 나긋나긋한 말투… 모든 게 법조인 출신의 어떤 여성 정치인을 연상시키던데. 극중에도 ○○학원 둘째딸이라고 나오고.
“감독님은 그런 이미지를 염두에 두고 배우를 캐스팅하셨을 수 있어요. 제가 쓸 때부터 특정인을 생각한 건 아니었고요. 그런 생각은 있었죠. 학교 다닐 때 보면, 너무 좋은 집안에, 예쁘장하고, 공부 잘하고, 호감 가는 사람인데 세계관 자체가 너무 순진한, 그래서 미래가 참 걱정되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런 종류의 사람이 검찰에서 중책을 맡게 되면 어떻게 될까 상상하고 썼어요.”
1997년 DJ 당선 때 성인이 된‘소수의견’과 ‘디 마이너스’의 작가
발랄함과 묵직함 교차하는 그는
잊혀진 90년대 세대의 상처에
헌정하는 글을 쓴다고 말했다 안양고 시절 친구와 힙합그룹
활동하며 나름 각광받았지만
대형 음반사와 잘못 계약 맺어
5년여간 지루한 법정공방 시달려
그 소송 경험이 ‘소수의견’의 자산 법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 -<소수의견>을 통해서 작가로서 하고 싶었던 얘기는 뭐예요? “가장 큰 것은 ‘법의 절대성에 대한 의문’이죠. 법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법정을 소재로 한 소설이나 영화에서, 영화 <변호인>도 그랬듯이 ‘법정신으로 돌아가자. 최소한 법이라도 지켜라!’ 하면서 법의 신성함을 옹호하는 경우가 많은데 좀 다른 시각이군요. “법은 기껏해야 50~60년짜리 안목이에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을 기준으로 봐도 법은 60~70년밖에 안 되었죠. 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상식은 최소 수백년에서 수천년짜리 규범인데, 종종 그 두 가지 규범이 충돌할 때 고작 60년짜리 규범이 절대적인 기준처럼 얘기되는 경우가 많아요. 법은 인간이 만든 거고 얼마든지 개정 가능한 건데, 마치 신이 던져준 것처럼 이해되는 경우가 많잖아요. 우리가 그렇게 믿기 때문에 법이 불법을 정당화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죠.” -법이 불법을 정당화한다고요? “통합진보당 해산 사태도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헌법재판소가 위헌이라고 판결했지만, ‘반국가단체를 해산할 수 있다’는 조항과 ‘국가는 정당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이 둘 다 법에 있어요. 그런데 헌재가 이 법률을 한쪽으로 해석하는 순간 이의제기를 할 여지가 없어지죠.” 손아람은 힙합그룹의 래퍼로 활동한 경험이 있다. 안양고등학교 재학 시절 친구와 듀오 ‘진실이 말소된 페이지’라는 그룹을 만들고 언더그라운드에서 꽤 알아주는 뮤지션으로 각광을 받았지만 대형 음반사와 잘못 계약을 맺었다가 길고 지루한 법정공방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돈 한 푼 안 주고 음반을 내준다는 약속을 차일피일 미루면서 붙잡아두는 대형 기획사의 노예계약에 대해서 그는 할 말이 많다. 5년여에 걸친 소송 끝에 승소했지만 그사이 그룹은 해체되고 그는 작가가 되었다. 그때의 소송 경험이 <소수의견>을 쓰는 데 자산이 되었다. -고교 시절부터 뮤지션 활동을 했으면서도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리고 소설가가 되었고요. 이런 얘기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 반응은 어떨까요? 존경스러워하기보다는 좀 짜증을 낼 것 같은데.(웃음) 아이큐 테스트도 만점을 받았다면서요? 그런 게 가능하단 걸 손아람씨 통해서 처음 알았어요. “(겸연쩍은 표정) 출판사에 그런 것 좀 홍보 포인트로 삼지 말라고 계속 얘기하는데….” -궁금해서 그러는데, 만점 맞으면 아이큐가 몇이에요? “156까지를 보통 테스트하거든요. 평균이 100인데 156이면 1.5배 똑똑하다 이런 뜻이 아니고요, 이게 정규분포 지수라서… 여튼 좀 사기성 포장이 있어요. 인간의 지적 능력의 차이는 너무나 미세한 건데. 작가가 그런 걸로 얘기되는 건 좀 부끄럽죠.” -타고난 재능이 뛰어난 사람들 보면 그런 생각 들잖아요. ‘쟤는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는구나’ 하는….(웃음) “저는 재능이 여러 개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에겐 하나예요. 글을 쓰는 일. 음악을 할 때도 랩 가사로 언어적인 걸 음성화했을 뿐, 영화든 칼럼이든 소설이든 다 같은 일이죠. 호기심 때문에 관심이 가면 일단 뛰어들어서 해보는 편이에요.” -‘했다가 망하면 어쩌지’ 하는 생각 안 해요? “망해도 해봐야죠. 안 하고 지나가면 나중에 ‘했더라면 엄청나게 성공했을 텐데’ 하는 환상을 평생 지니게 되거든요.” -하하하, 그런 경우 있죠. “전 소문난 맛집은 꼭 찾아가서 확인을 해요. 맛이 없다는 걸. 안 그러면 내 입맛에 딱 맞을 것 같은데 못 먹어봤다는 아쉬움을 갖게 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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힙합 래퍼 출신의 소설가 손아람은 작가로서 꼭 쓰고 싶은 이야기를 묻자 자신의 이야기를 인터랙티브하게 구현할 수 있는 방식의 게임을 기획해보고 싶다고 했다. 왼쪽은 인터뷰어 이진순. 강재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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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손아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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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가진 감정이나 상식은
최소 수백년에서 수천년짜리 규범
종종 그 두 가지가 충돌할 때
60년짜리가 절대화돼야 하나” “오늘날 모든 정치적 의제는
사악한 적 아닌 무관심과의 싸움
무관심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요?
압도적 옳음으로? 냉철한 논리로?
차라리 유머·눈물·매력을 믿어요” 민주당 집권 10년간 싸운 학생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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