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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01 10:25 수정 : 2014.02.11 10:16

강영숙 소설 <폴록> ⓒ전지은



강영숙 소설 <1화>



K 이사는 J가 최근에 만난 사람 중에 나이가 가장 많은 사람이었고, 어쩌면 비교적 성공한 여자 중 한 명이었다. 인터넷 검색창에 이름을 치면 동명이인 셋 중 가장 큰 얼굴 사진이 나왔다. J는 나중에 그 사진을 K 이사의 장례식 영정사진으로 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J는 성공한 여자들이 싫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K 이사를 만나는 게 불편했다. 성공한 여자들의 냄새도, 말투도 싫었다. 시간이든 공간이든 모두 다 자기 편리한 쪽으로 끌어가고, 그렇게 하는 걸 아주 당연하게 생각하며, 사과도 보상도 안 하는 당당함이 무서웠다. J는 가능하면 그런 여자들은 만나지 않고 살고 싶었다.

J는 환경운동 단체에서 인턴으로 일했다. K 이사를 포함해 비교적 일찍 환경운동을 시작한 여성들의 활동을 구술과 영상으로 남기는 일을 돕게 됐다. J는 그 일이 자신에게 적합한지 어떤지 잘 알지 못했다. 그룹으로, 개인으로 사람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식어가는 용암처럼 늙어가고 있었다. 누군가 그들이 한 일을 나열하고, 부풀리고, 의미부여를 하면 언젠가 다시 용암처럼 끓어오를 수도 있다고 J는 믿었다. 그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를 정리하는 건 어쩌면 쉬웠다. 그런데 K 이사의 경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말하는 차원의 진술과는 다른, 말로 하기 어려운 층위의 일들이 존재했다.

그래서 J는 아무런 소용도 없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장르를 정할 수 없어 고민하다가 전공한 도서관학에서 들은 한 가지 개념을 빌려 왔다. 최종 단행본이 되기 이전의 자료, 공식자료 이전의 자료, 과정을 보여주는 회의자료, 최종 결과물이 나오면 결국 폐기하게 될 자료를 통칭해서 부르는 이름 Grey material, 회색 문헌.

1.

택시기사가 K 이사의 집 주소를 내비게이션에 찍고 난 뒤 삼십 분쯤 지나 택시는 은평구의 낮은 연립주택이 있는 골목길에 섰다. 번지수를 들고 찾은 집 대문에서 고개를 돌렸을 때 이쪽의 연립주택들보다는 훨씬 높아 보이는 고층빌딩의 한쪽 모서리와 북한산의 일부가 빌라와 빌라 사이의 허공에 길쭉하게 잘렸다. J는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대문 앞에서 왔다 갔다 했다. 왜 그런지 별로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사님은 혼자 살아.

같이 일하는 선배한테 들은 바로 오십 세가 넘은 K 이사는 싱글이었다. 싱글이라는 의미가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것인지, 최근에 싱글이 되었다는 것인지 J는 알 수도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그렇게 나이 많은 여자의 가족이나 애정 문제에 대해서는 궁금해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러나 대문에는 한글로 된 문패 두 개가 나란히 붙어 있어서 잘못된 정보일 수 있다는 생각도 했다.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본 건 딱 두 번뿐이었어요. 한 번은 뉴욕에서, 또 한 번은 일본에서. 자기는 본 적 있어?

신입 인턴에게 자기라는 호칭은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한가하게 잭슨 폴록 얘기나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닌 집 안 상태가 훨씬 부담스러웠다. 뭐든 보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저장 강박증에 걸린, 호딩(Hording) 장애를 겪고 있는 사람이 분명하다는 확신이 들 정도로 집 안은 난장판이었다. 그런데 K 이사가 아무렇지도 않은 척, 멀쩡한 척 다시 잭슨 폴록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J는 지루해서 휴대폰 시계를 내려다봤다.

내가 잭슨 폴록에 대해 알고 있는 건 사실 별로 없어요. 잭슨 폴록 그 자체보다는 내가 그 사람의 그림을 본 두 번의 횟수 앞과 뒤, 그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얘기를 하려는 것이니까.

그때 J는 자신의 번호를 수신인으로 문자를 보냈다.

저기요, 제가 왜 그 얘기를 들어야 하죠.




강영숙(소설가)
강영숙

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8월의 식사〉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흔들리다》(2002), 《날마다 축제》(2004), 《빨강 속의 검정에 대하여》(2009), 《아령 하는 밤》(2011)이 있으며, 장편소설로《리나》(2006), 《라이팅 클럽》(2010)이 있다. 2006년 제39회 한국일보문학상, 2011년 제4회 백신애문학상, 2011년 제5회 김유정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재)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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