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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02 10:25 수정 : 2013.07.08 13:51

강영숙 소설 <2화>



J는 거실에 걸린 유화 한 점 아래로는 절대로 시선을 두고 싶지 않았다. 바닥을 따라서 늘어놓은 물건이며 가재도구들은 바닷가의 자갈들처럼, 유적지의 유적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집의 상태와 관계없이, 그럼에도 그 집에서 가장 상태가 괜찮은 것은 K 이사뿐인 것 같다고 J는 생각했다. 살집이 없는 몸매에 자잘한 줄무늬가 그려진 파자마를 입고 미색 스웨터를 걸친 채 화집을 들고 있는 모습은 나쁘지 않았다.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차분하고 아름다워 보였다. 노회한 느낌은 전혀 들지 않았고 무섭거나 딱딱한 인상도 아니었다. J는 그렇게까지 나이 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본 적이 없어서 나이 든다는 것에 대해 잠깐이나마 긍정적인 생각마저 할 정도였다.

간단하게 자기소개를 하고 찾아온 용건을 말하는 동안 K 이사는 무릎 위 화집 표지에 손을 올린 채 한 손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러면서 전공은 뭘 했고, 장래 희망은 뭐고, 왜 환경운동 단체에 들어왔으며, 일은 재미있느냐는 등 누구나 할 수 있는 질문을 했다. K 이사는 가끔 머리를 쓸어 올리기도 하고 한 손으로 턱도 문질렀다. J는 성의껏 대답하려고 노력했다.

인터뷰 녹취 테이프 속에서 K 이사가 한 얘기.

1987년이 지나고 1988년 초반이었어요. 나는 공해추방 단체에서 일하게 됐어요. 일하게 된 곳과 상관없이 여성이라는 자의식에 한창 붙들려 있을 때였어요. 여자가 뭘 하려면 먼저 집안의 천사를 살해해야 한다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아무 데서나, 아무런 맥락도 없이 하고 다녔죠. 그때 막 그런 단체들이 생겨났죠. 시대가 요구한 거나 다름없어요. 세 명이 같이 일을 시작했는데 우린 정말 친자매들보다도 더 친했어. 매일 같이 다니고 주말도 없이 어울렸지. 공사 구분도 없이 내 것 네 것도 없이 어울렸어요.

한 소년이 있었어요. 소년은 충청남도 서산 출신인데 열다섯 살이었어요. 영등포에 있는 무슨 계공, 이름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거기 취직했는데 겨우 삼 개월을 일하고 수은중독으로 죽어 버렸어. 우리가 조사하러 갔을 때 작업장 바닥에 수은이 굴러다니고 있었어. 공부를 잘했지만, 학교에 갈 수 없어서 야간학교에 다닐 수 있게 해준다는 말에 속아 거기까지 간 건데 죽어 버렸어. 우리가 그 회사 사장과 싸웠어. 나는 지금도 그 애가 영등포의 그 공장 작업장 바닥에 깔린 수은 위를 재미있다는 듯 미끄러져 다니는 꿈을 꿔. 그 애의 아버지는 아들이 죽은 줄도 모르고 빨리 일어나 학교에 가라는 개그 같은 말을 했대요. 겨우 열다섯 살, 지금까지 살았어도 마흔 살 정도밖에 안 된, 그런 어린 애가 수은 중독에. 사실 수은 중독만이 아니었어. 온산병, 이타이이타이병, 그런 거 들어봤어요?*

우린 그 애를 보면서 이상적인 공동체 얘기를 했어요. 아무도 아프지 않고 아무도 죽지 않는 공동체. 그런 공동체를 세우는 일.

대화를 나누는 중에 유선전화가 한두 차례 걸려왔고 J가 전화를 받으려고 했지만, K 이사가 길고 흰 손을 내저었다. J는 잭슨 폴록 얘기도 귀찮고 단지 쓰레기 더미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그러면서도 J는 용감하게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했다.

이사님 저는요. 그러니까 저는요. 면접할 때, 떨어질 줄 알았어요. 이상한 얘기만 했거든요. 어떻게 하면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저는 아무도 해결할 수 없다고 대답했어요.

해결 따위는 없습니다.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죠.

허리케인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창문에 엑스 자로 테이프를 붙여야 하고, 지구 온난화 때문에 그늘로 피해 들어간 남반구 사람들처럼 우리도 할 수만 있다면 자기 집 지하에 벙커를 만들어야 한다고 J는 말했다. 고비사막에서 매년 백만 톤씩의 모래가 베이징으로 날아가는데, 우리가 먼지 봉지나 마스크를 만들어서 수출하자는 제안도 했다.

크크크크.

K 이사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J는 그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뭔가 기분이 좋지 않고,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 같아 멈추지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 파란색으로 표시한 부분은 다음의 책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니시나 겐이치, 노다 교우미 지음, 육혜영 옮김,《한국공해리포트-원전에서 산재까지》, 개마고원,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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