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 폴록 <5화>
꼭 가봐야 하는 전시가 있으니 미술관에서 만나자고 한 건 K 이사였다. 그런데 5시가 넘어서도 K 이사는 미술관에 나타나지 않았다. 휴대전화도 받지 않았고 전화가 걸려오지도 않았다. J는 가방에서 포스트잇을 꺼내 들었다. 미술관 담벼락에 기다리다 간다고 써 붙여 놓아야 하나 망설였지만, 그냥 돌아섰다. 성공한 여자들은 결국 다 이렇다는 걸 또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J는 ‘미국 미술 300년’이란 타이틀이 붙은 전시 브로슈어만 안내 데스크에서 받아 들고 나왔다. 도대체 남의 나라 미술 300년 전시를 왜 봐야 한다는 것인지, J는 아무것도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나마 가 앉아 있지 않으면 아무것도 안 하는 거 같아 불안해 다니기 시작한 영어 학원 수업 시간이 가까워져 더 기다릴 수도 없었다. 날씨 얘기를 포함한 잡담까지 총 오십 분 강의를 듣고 나온 J는 인근 카페로 들어갔다. 그리고 무심코 전시 브로슈어를 들여다봤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는 잭슨 폴록의 그림 ‘넘버22’가 인쇄되어 있었지만, 그저 그런, 흔한 추상화의 하나일 뿐이라고 느꼈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차창 아래로 흐르는 한강을 내려다봤다. J는 혼자 웃었다. K 이사가 집에서 자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후후후.
그때 K 이사의 전화가 걸려왔다.
자기 지금 어디야?
J는 순간 화가 나서 입술을 물었다.
아직도 이렇게 이상한 말투이신가. 미안하다는 말도 없이.
어쨌든 버스는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었다. 버스를 탔을 때는 그나마 불빛들이 있었는데, 시간은 온통 깊은 밤의 와중으로 떨어졌다. 비닐 천막을 켜켜이 덮어놓은 상가 건물 옆을 지나고 하천 위를 지났다. 편의점의 흔한 삼색 줄무늬 불빛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가로등 하나 켜고 있지 않은 어둡고 후진 동네였다. 종점까지 가는 거 맞죠? 버스가 덜컹거리는 노면 위를 막 통과할 때 J가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뒷자리를 돌아봐도 아무도 없었다. 버스가 심하게 흔들렸다. 너무 흔들려 기분 나쁜 말들이 마구 떠올랐다.
난 너한테 많은 기대를 했는데, 네가 지금 그러고 있는 게 만족스럽지 못한데, 그래도 어쩌겠니. 인턴이라도 해야지. 설마 후쿠시마 같은 데 가는 건 아니겠지? 원자력 발전소 근처에는 가지도 마. 방사능에 오염되면 우리한테도 퍼지니까. 만일 우릴 속이고 그런 데에 갔다면 우리한테 돌아오지 마. 돌아오지 마.
한 손으로 앞 의자 손잡이를 잡고 들뜬 듯한 머리를 만지며 운전기사에게 물었다. 아저씨 혹시 이 차 미술관 가나요? 종점에 미술관이 있나요? 내가 운전을 오래 했는데 이 차는 한 번도 미술관에 간 적 없는데, 차를 잘못 타셨어요. 버스는 더욱더 속력을 냈다.
버스는 종점 정류장 앞에서 형식적으로 한 번 선 뒤, 이내 차고지로 들어가 버렸다. 그나마 남아 있던 불빛들마저도 버스가 도착한 시점을 기해 일시에 꺼졌다. J는 버스 정류장 앞에 서서 표지판을 올려다봤다. 생전 처음 보는 지명들이 암호처럼 띄엄띄엄 적혀 있었다. 버스 정류장 뒤편의 담벼락 안에서 개 짖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이내 다른 버스 한 대가 정류장으로 들어가기 위해 막 커브 길을 돌았다. 주변은 푸른 기운이 사라지고 금세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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