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 소설 <6화>
가게는 버스 정류장을 지나 교차로 쪽으로 가는 길 오른편 모퉁이에 있었다. 가게 앞 파라솔 밑에 젖은 박스처럼 짜부라진 채 K 이사가 앉아 있었다. K 이사와 같이 앉아 있는 사람들은 모두 외국인들이었다. 한 명은 흑인 남자, 또 한 명은 머리에 수건을 쓴 아랍 여자, 또 한 명은 키가 큰 백인 남자였다. 그들은 아무 말도 없이 파라솔 아래 앉아 각자 눈앞의 좁은 영역만 보고 있었고, 가게 안쪽에서부터 텔레비전 소리가 들려왔다.
철제 앵글 두 개 뒤의 미색 조명이 켜진 방에서 할머니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졸고 있었다. J는 가게로 들어가 무심코 작은 초콜릿 하나를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껌도 하나 넣었다. 할머니가 뭐라고 하면 돈을 내 버리면 그만이라고, 뭔가 좀 장난스러운 기분이 되었다. 뭘 원하세요? 그때 파라솔 아래에 앉아 있던, 머리에 수건을 쓴 아랍 여자가 유창한 한국말로 J한테 물었다. 여자는 할머니가 졸고 있는 방 입구에 붙어 있는 냉장고 문을 열고 팩에 든 초콜릿 우유를 꺼냈다. 여자의 눈동자가 너무 커서 굴러떨어질 것 같았다. 난 얼마인지 모르니까 그냥 마음대로 돈을 내세요. 여자가 검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J는 천 원짜리 두 장을 꺼내 여자에게 주었고, 여자는 그 돈을 초록색 알루미늄 돈 통에 넣은 뒤 소리 나게 닫았다. 그게 다였다. 여자는 다시 파라솔 아래로 가 앉았고, 네 사람 모두 말없이 각자 앞만 쳐다봤다. J는 사각의 우유갑을 열었다. 그리고 K 이사에게 다가가 어깨를 한 손으로 잡고 입을 벌리게 한 후 초콜릿 우유갑 모서리를 입속으로 넣었다.
정말 미안해. 내가 왜 여기 와 있는지 모르겠어. 나는 분명 미술관으로 가는 길이었어. 잭슨 폴록을 보러. 미국 미술 300년이라고 적힌 팸플릿이 분명 내 손에 들려 있었는데. 핸드백 안에도 코트 주머니에도 없어. 버스는 미술관 앞에 나를 내려놓아야 했다니까. 그런데 그러지 않았어. 난 입술이 아파. 버스에 있는 내내 입술이 아팠어. 다들 나한테 왜 이러지. 난 미술관으로 가는 길이었어.
이건 또 무슨 모드야. 차라리 주무시는 게 낫네요.
난 요즘 툭 하면 아무 데서나 잠이 들어 버려. 분명 피피티 액정을 올려다보며 회의 진행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잠이 들었나 봐.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잠이 드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었어. 문제는 아주 중요한 순간에 잠이 든다는 사실이야. 절대 잠이 들어서는 안 되는 자리에서 잠이 드는 거야. 수저에 뜬 밥이 채 입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이라든가, 은행에서 대기번호를 기다리다 다음 차례라는 걸 확인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든가. 문제는 깨고 나면 더 잠이 온다는 거야. 조금 전까지 빠져 있던 잠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옆 사람에게 말하곤 했지. 여기 뭐 깔개 같은 게 없을까. 그리고 회의실 바닥에 모로 누워 자 버려. 마치 심한 멀미를 느껴 배 난간의 기둥 아래 길게 누운 사람처럼 말이야.
악몽 같은 걸 꾸었을 거라는 건 잘못된 생각이야. 내 친구 중에 국민더잠자기운동본부를 만든 애가 말하길, 내가 더 잠을 자면 세상에 평화가 온다는 거야. 나는 단체 회원도 아닌데 자고 또 잔다! 난 와해되어 버렸어. 다 깨져 버렸다고. 폴록을 봐야 했는데. 내가 그때 도망치듯 미국으로 가서 온종일 폴록의 그림을 들여다봤거든. 그런 에너지, 그런 충동, 그런 구도가 아니면 해결이 안 되는 지경이었던 나. 그때 생각을 하고 싶은데.
와해됐다는 말! 멘붕일 때 쓰는 말인 듯.
사람들은 나를 금치산자 취급했어. 그런데 나는 금치산자가 될 수 없는 사람이야. 나는 그 얘기를 하고 싶어. 나는 이렇게 무기력하게 잠만 잘 수는 없는 사람이야.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데.
아무래도 나는 와해된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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