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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09 09:58 수정 : 2014.02.20 20:13

강영숙 소설 <7화>



택시는 올 것 같지 않았다. J는 조금 앞서 길을 내려가 버스 정류장 쪽 모퉁이를 돌았다. 어둠 속에서, 시멘트 바닥을 툭툭 때리며 튕겨 오르는 농구공 소리가 들렸다. 흰 모자가 내뱉는 숨소리가 농구공 소리와 함께 어둠 속에서 흔들렸다. K 이사는 결국 비닐 장판을 깐 평상에 걸터앉아 버렸다. J는 훔친 초콜릿을 까 입에 넣어주었다. 보따리를 양손에 잔뜩 든 여성 노숙자가 평상 앞을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꽃이 이쁘네. 꽃이 이뻐. 그러고 보니 버스 정류장 담벼락은 꽃나무로 둘러싸여 있었다. 농구공 소리에 꽃잎들이 흔들려 떨어졌다. 노숙자는 버스 뒤편으로 자취를 감추고, 버스 종점의 허공에는 언제 흔들렸느냐는 듯이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지나가는 택시를 만나면 탈 생각이었다. 어두운 거리를 좀 달리면 곧 도시가 나오고 익숙한 불빛에 몸을 섞으면 또 그간의 일은 다 그만인 것이 된다고 J는 생각했다. 그리고 한참을 걸었다. 발바닥에 감촉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걸었다. 주홍색 택시를 잡아탔을 때 K 이사는 머리를 떨구고 곧 잠들어 버렸다. J는 가방 속에 든 전시 팸플릿을 꺼내 그녀의 가방 속에 넣었다.

택시가 은평구로 진입하기까지 K 이사는 내내 잤다. 말로는 혼자서 들어갈 수 있다고 했지만, 다리가 툭툭 꺾여서 부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낮은 주택 담벼락 위에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앉아 있었다. 열한 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는데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집은 더 어지러웠다. 이 집은 버려둔 채 다른 집에 가서 살다 잠깐씩 오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K 이사는 침실로 들어갔고, J는 택시를 타고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소파에 앉았다. 눈을 뜨면 소파 주변에 있는 책들이며 화분들이 쓰러질 것 같아 불을 끄고 누웠다. 거실이 추웠다. 코끝이 시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때 K 이사가 미색 스웨터를 걸친 채 방에서 나왔다. 핏기 없는 얼굴로 부엌 쪽으로 가 어지럽게 쌓인 상자들 틈에서 생수병 두 개를 들고 왔다. 집에 갔을 줄 알았는데 안 갔네. 그녀가 약간은 환해진 얼굴로 말했고 J도 조금은 편안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엄마가 새벽에 다니는 걸 안 좋아해요. 새벽에 들어올 거면 아예 자고 오라고 해요.

내가 요즘에 곰곰이 생각을 해봤는데. 그러니까 내가 왜 자꾸 아무 데서나 자는지, 그런 거 말인데. 아무래도 2009년에 앓은 신종 플루 때문인 것 같아. 그때 백신을 맞았는데, 그 백신을 맞은 이후로 자꾸만 잠이 쏟아져. 그때 내 딸년은 날 버리고 미국으로 도망가 버렸어. 너무 아파서 돌아오라고 전화를 했는데, 자기도 아프다며, 울며 난리를 쳤어. 그 애는 늘 몸보다 마음이 아픈 애였어.

J는 생수병을 든 채 가만히 손에 힘을 주며 K 이사의 얼굴을 쳐다봤다. 뭔가 말하고 싶었다.

이사님. 그런데 백신 때문에 잠을 많이 잔다는 걸 어떻게 증명하나요. 저도 좀 생각해봤는데요. 아까 거기 가게 앞에 앉아 계실 때, 외국 사람들과 거기 앉아 계실 때요. 이사님이 그렇게 아무 데서나 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까요. 전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총을 쏘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잠 좀 잔다고 해서 누가 뭐라고 할까요. 그리고 그게 꼭 신종 플루 때문이라는 증거도 없잖아요. 이사님은 그냥 나이가 들어서, 전반적으로 갱년기 증상에, 이제 그냥 지친 게 아닐까요.

화를 내면 어쩌지.

그날 밤, J는 K 이사가 늦도록 잠이 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안방에서 들리는 신음 때문에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가 봤다. 그녀는 한쪽 다리를 작은 필로우 위에 얹은 채 벽 쪽을 향해 모로 누워 있었다. 자꾸만,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한숨을 쉬기도 하고 입 밖으로 거품을 내뿜기도 하면서, 계속 쏟아내는 소리를 J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이사님. 제가 어떻게 해 드릴까요? 어딘가 좀 만져 드릴까요? 너무 힘들어 보여요. 그 소리 정말 듣기 싫어요. 그런 말 밖에는 할 수 없었다. J는 누렇게 말라빠진 저온 냉장고 안의 치즈 케이크 같은 얼굴로 몸을 움직여 자신을 쳐다보는 K 이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발바닥이 아파. 난 발바닥이 아프고 넌 눈썹이 예쁘구나. 난 낙타처럼 긴 속눈썹이 좋아. 너희가 눈썹이 긴 건 그만큼 대기오염이 심해졌기 때문이야. 이중, 삼중으로 긴 눈썹이 아니면 먼지를 막을 수 없어. 발바닥이 아파, 발바닥이, 발바닥이, 아파…….

낙타가 되어야 한다면 몸에 새길 무늬는 내가 직접 고르게 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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