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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0 10:04 수정 : 2013.07.17 11:06

강영숙 소설 <8화>



3.

봄이 무르익어 갔다. J는 낮이면 녹취 테이프를 들었다. 어떤 때는 밤에도 들었다. 듣다가 K 이사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또 잠든 게 아닐까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 갔다 했다. 지하철에서도 휴대폰으로 녹취 파일을 계속해서 들었다. 집에 돌아가면 낙타처럼 긴 속눈썹을 붙이는 연습을 했다. K 이사의 말처럼 도시가 사막화되면 결국 모래바람을 피해야 하고, 그러려면 눈썹이 길어야 하니까. 낙타처럼 이중, 삼중이어야 하니까. J는 이산화탄소를 걸러주는 호흡기의 중고 거래자가 나섰다는 이메일을 받았다. 100만 원이나 하는 고가의 가격 때문에 구매하기는 어려웠다. 그 대신 사이트에 들어가 새로 나온 장비들을 구경했다. 이 정도면 환경운동 단체에서 일하는 인턴 스태프로서의 자질은 충분한 게 아닌가 위로하며.

4.

그러거나 말거나 K 이사는 또 이상한 곳에 가 있었다. 햇살이 등과 머리에 내리꽂혔다. J는 다리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는 여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여자의 등은 큰 새우처럼 휘어져 있고, 두 팔은 수직으로 늘어진 채 대책 없이 흔들렸다.

J는 다리 이쪽에서 맹렬하게 담배를 피워대는 남자들과 일렬로 서서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는 잠깐 멈춰 난간을 잡은 채 다리 아래 하천을 내려다봤다. 곧 쓰러질 것 같았다. 노숙자네! 남자들이 피우던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커다란 건물 입구 쪽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K 이사였다. J는 자신의 엄마가 아파서 괴로워하는 할머니에게 늘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엄마, 이제 편안히 가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편안히 가도 돼, 차라리 가는 게 나아. 내 두 팔을 덥석 잡는 K 이사의 얼굴을 본 순간 J도 엄마 같은 말을 하고 싶었다.

이사님, 차라리 주무세요.

그들은 흰 외벽의 커다란 건물을 등지고 작은 구멍가게 앞에 놓인 파라솔 아래 앉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의자 두 개를 나란히 붙여 놓고 J의 몸에 머리를 기댄 채 K 이사는 죽은 듯이 잤다. 다리 위로 커다란 덤프트럭이 굉음을 내며 지나갔고, 공장 쓰레기들을 주워 모으는 리어카가 한 대 지나갔다. 뿌연 대기를 뚫고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하나둘 다리 이쪽으로 넘어왔다. 새들은 보이지 않았고 비닐봉지도 날지 않았다.

J는 휴대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는 택시 앱을 열고 GPS를 켰다. 알 수 없는 지명들이 계속 올라왔다. 정확한 위치를 찾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그리고 택시 호출 버튼을 눌렀다.

주홍색 택시는 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왔다. 택시 앞자리에 누군가 타고 있었다. 머리에 수건을 쓴 아랍 여자가 얼굴을 돌려 뒷자리를 쳐다봤다. 흰 수건 속에 파묻힌 머리카락과 눈동자가 지나치게 크고 검어서 J는 자꾸만 뒤통수를 쳐다봤다. 물 있어요? 아랍 여자는 물 한 병을 꺼내주고는 손바닥을 편 채 치켜들었다. J는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올려놓고 물을 마셨다. J는 그 물에서 왠지 오줌 맛이 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불이 나 어떤 건물에 갇히거나 하면 결국 오줌을 받아 마셔야 한다는 생각을 하며 참았다.

가까이에 바다는 없어요. 바다 비슷한 곳은 있지. 그러면서 아랍 여자는 왼쪽에 앉은 기사를 쳐다보며 키득키득 웃었다. 남자의 마스크에는 검은색 글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잘 보이지는 않았다. 택시는 커다란 건물을 몇 개 지나고 난 뒤, 우주선처럼 흰 캡슐 안에 넣어놓은 도로 양쪽의 볏단들을 지나 좁은 흙길을 달렸다. 아랍 여자는 휴대폰으로 짧게 울리는 전화를 여러 번 받았고, K 이사는 계속해서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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