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영숙 소설 <9화>
택시기사가 차를 세웠다. 그의 마스크에는 ‘Google’이라는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비쩍 마른 나무들이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곳을 대충 가리고 있었다. 아랍 여자와 택시기사는 나무들을 헤치고 탁 트인 쪽으로 쉽게 내려갔지만, J는 K 이사를 거의 업고 어쩌지 못한 채 서 있었다. 그때 아랍 여자가 다가와 K 이사의 뺨을 여러 차례 때렸고, 그제야 K 이사는 눈을 뜨고 앞을 봤다. 드디어 자기 힘으로 허리를 편 채 서 있게 된 늙은 여자는 새로운 세상을 본 것 같은 얼굴로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J는 그때 그곳을 소개하는 표지판을 보았다. 그곳은 U 만(灣)이었다.
바다다!
아랍 여자가 소리를 치며 가방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얼굴에 걸치고 택시기사의 팔짱을 낀 채 흰 거품이 가득한 바다 쪽으로 걸어갔다. 바다 이쪽에는 흰 시멘트 건물 하나가 있었는데, 양복을 입은 남자 세 명이 건물 앞 자판기 근처에 서서 맥주를 마셨다. 근무 시간에 땡땡이친 회사원들 같았다. 두 사람이 남자들 앞을 지날 때 그들이 갑자기 현란한 지그재그 스텝으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개운해.
K 이사는 두 팔을 벌리고 입꼬리를 찢으며 웃었다. 흰 거품이 자꾸만 비좁은 모래사장 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고, 바닷물이 밀릴 때마다 흰 거품은 점점 더 커졌다. 무거워 보이는 회색 거품은 모래에 파묻히고, 흰 거품은 점점 더 면적을 넓혀갔다.
젤리 피시다!
끈적해 보이는 흰색 덩어리가 미지근한 물 위로 부유물처럼 떠올랐다. J는 발끝으로 덩어리를 건드려봤지만 어떤 움직임도 없어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들은 차 소리도 들리지 않는 모래 위에 앉았다. 아랍 여자와 택시기사는 손을 잡고 점점 멀리 걸어갔다. J는 배낭 속에 든 물을 꺼내 병뚜껑을 열어주었고, K 이사는 물을 마셨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자 늙은 여자는 J의 무릎을 베고 다시 누웠다. 태양이 뜨거웠고 저만치 걸어간 아랍 여자와 구글 마스크를 쓴 남자는 약간은 경사져 보이는 모래밭 위에서 섹스를 했다. J는 규칙적으로 허공을 향해 뻗어 올라가는 구글 택시기사의 흰 엉덩이를 보면서 무릎 위에 잠들어 있는 늙은 여자의 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흰 머리카락들이 두피를 뚫고, 무서운 기세로 마구 뻗어 나오는 중이었다. 머리카락들은 너무 강하고 억세서 잡아당겨도 빠지지 않았다. 그때 확성기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삶은 모험입니다.
녹취 테이프 속에서 늙어가는 여자 중 한 사람이 한 말이, 인명 구조를 알리는 스피커 주둥이를 통해 천천히 반복되었다. 삶은 모험입니다. 만 저쪽에서 섹스를 하던 아랍 여자와 구글 택시기사는 비명을 지르며 한 덩어리가 되어 모래 위를 뒹굴었다. 누구에게나 삶은 모험일까. J는 비명을 지르는 남녀를 보며 그들에게 삶은 오르가슴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J는 한 손으로 자꾸만 K 이사의 볼을 꾹꾹 눌렀다.
잭슨 폴록의 그림을 본 건 딱 두 번뿐이었어. 한 번은 뉴욕에서, 또 한 번은 일본의 어느 시골 미술관에서였어. 미술에 대단한 조예가 있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폴록을 좋아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나는 폴록이라는 이름의 어감과 함께 그의 그림을 좋아했던 것 같아. 순서로 보면 일본에서 본 게 먼저였고, 뉴욕에서 본 건 그로부터 4년 뒤였어. 폴록을 두 번 본 그 십 년간, 내 삶에서 많은 것들이 떨어져 나갔어. 미국에서 폴록을 봤을 때, 그 전시실에 들어갔을 때 폴록의 경쟁자였던 윌렘 드 쿠닝과 마크 로스코, 그리고 폴록의 그림이 한공간에 있었어. 나는 그냥 그걸로 됐다고 생각했어. 그걸 본 것으로 모든 것들을 덮자고. 아주 좋아하는 그림들이었어. 그제야 나는 알았던 것 같아. 그냥 잠깐 흘러간다는 걸.
제가 봐도 정말 빨리 흘러가요.
이사님, 그리고 잠은 기필코 밤에 자야 해요.
이렇게 낮에 자면 안 된다고요.
J는 얼굴을 숙인 채 늙은 여자의 귀에 입을 대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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