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정민석의 해부하다 생긴 일
나는 중고등학교 학생일 때 국사 과목이 싫었다. 사람과 숫자를 외우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누가 몇 년에 무엇을 했고, 또 누가 몇 년에 무엇을 했고…. 무엇을 했는지는 외울 만했지만, 사람과 숫자는 도저히 외울 수 없었다. 그때 국사가 얼마나 싫었는지 방송에 나오는 역사극도 보기 싫었다. 의과대학 학생일 때에도 사람과 숫자를 외우느라 애먹었다. 병, 진단, 치료에 사람의 이름이 너무 많았다. 이를테면 히르슈슈프룽(Hirschsprung)이 발견한 병은 히르슈슈프룽병이었다. “나는 날마다 보는 사람의 이름도 못 외우는데, 본 적도 없는 사람의 이름을 어떻게 외우란 말인가? 그 사람을 존경하지만 좋아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렇게 투덜거렸다. “히르슈슈프룽씨병이라고 읽는 사람도 있는데, 나는 좋아하지 않는 사람한테 씨를 붙일 생각이 전혀 없다.” 의과대학에서는 외워야 할 숫자도 끊임없이 나왔다. 어느 약을 하루에 몇 그램씩 며칠 동안 먹어야 하고, 그러면 5년 생존율이 몇 퍼센트이고…. “숫자를 억지로 외우기도 힘들지만, 시험 치르고 나면 외운 숫자를 금방 잊어서 맥이 빠진다. 의사가 된 다음에 외워도 늦지 않을 텐데.”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해부학 선생이 되어서 알아챈 것이 있었다. 사람과 숫자는 시험 문제로 내기도 편하고 채점하기도 편하다는 것을. 적혈구에 관해서 쓰라고 문제 내면 정답이 여럿이지만, 적혈구의 지름을 쓰라고 문제 내면 정답이 하나뿐이었다. 특히 객관식 시험 문제는 사람과 숫자로 아주 편하게 낼 수 있었다. 나는 해부학 선생이 되었을 때 정의감이 가득하였기에 이렇게 다짐하였다. “나는 편하게 가르치려고 학생을 불편하게 만들지 않겠다.” 다행히 해부학 용어에는 사람의 이름이 없다. 유스타키오가 발견한 관을 유스타키오관이라고 하는데, 해부학 용어로는 귀관 또는 귀인두관이다. 귀에 있는 관 또는 귀와 인두를 잇는 관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났을 때, 이름을 잊어도 별명은 잊지 않는다. 이름과 달리 별명은 그 친구의 특징을 잘 담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이름을 몰아낸 해부학 용어는 그 구조의 특징을 잘 담고 있어서 외우기 쉽다. 해부학 선생이 나쁘게 마음먹으면, 숫자를 얼마든지 가르칠 수 있다. 각 기관의 크기, 무게에서 각 근육의 길이, 너비, 두께까지 숫자가 끝없이 나온다. 나는 이런 숫자를 가르치지 않는다. 해부학 책에 나오는 숫자도 시험에 내지 않겠다고 말해서 학생을 안심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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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민석 아주대 의대 해부학교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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