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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07 19:40 수정 : 2013.07.12 10:09

양호경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토요판/연애]양호경의 청춘 십자로

첫 소개팅은 10분 만에 끝났다. 물론 주문한 파스타가 나오고, 그 음식을 다 먹을 때까지는 더 긴 시간이 걸렸지만 이미 이 소개팅은 망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개팅을 하기로 약속을 잡고 며칠 전부터 소개팅 선경험자들의 조언을 들으며 준비해간 질문들은 채 10분도 되지 않아 바닥이 났기 때문이었다. 만나서 서로 인사를 하고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좋아하는 영화가 뭐예요?”라는 질문을 시작으로 음악과 책에 대한 질문을 소개팅녀에게 쉴 틈 없이 던졌다. 소개팅녀는 조급한 나의 질문에 웃으면서 영화 <카사블랑카> 이야기를 해줬지만 나는 바짝 긴장한 채로 “네, 그렇군요”라고 말하며 머리로는 다음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다.

쉴 새 없이 준비된 질문 공세가 끝나고 처음 소개팅에 나온 어설픈 훈련병은 더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음식을 후다닥 비우고 나서도 죄 없는 맹물만 두어 잔을 들이켰다. 어색한 침묵 속에서 소개팅녀는 대뜸 나에게 “왜 제 눈을 보지 않고 말씀하세요?”라고 물었다. 난 당황한 나머지 “대화는 말로 하는 것이니까요”라는 마음에도 없고, 소개팅 교과서에도 나오지 않은 말로 첫 소개팅의 종료를 선언했다. 소개팅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오늘 즐거웠습니다. 다음에 또 봬요”라고 문자를 보내며 패자부활을 시도했지만 역시나 답 문자는 오지 않았다.

첫 소개팅 당시는 난 20살이었다. 연애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되는 사춘기 시절을 남중, 남고 6년간 남자들의 동굴에서 보냈다. 또래 이성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 없다 보니 남자들 사이에서 구전으로 들은 연애가 전부였다. 남녀간 서로의 관계성과 구체적 긴장감은 생략되고, 건조한 공식만이 남은 연애를 그냥 ‘배운’ 것에 불과했다. 여러 기호의 나열로 만들어진 수학 공식을 열심히 외웠건만 연애의 실전 문제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했다. 당연히 첫 소개팅의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소개팅이 끝나고 몇 년 뒤에 영화 <카사블랑카>를 처음으로 봤다. 첫 소개팅녀를 다시 만난다면 “그 영화 저도 봤어요. 옛날 영화라 좀 지루하긴 했지만”으로 시작하는 영화에 대한 감상으로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10여년간 80여번의 소개팅 경험으로 보면 영화를 본 경험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머릿속에 준비해 온 시나리오는 버리고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상대의 말에 집중하며 조금씩 그 사람을 알아가면 족하다.

소개팅도 하나의 관계 맺기이기 때문이다. 소개팅은 상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나가서 상대가 좋아하는 영화나 음악이 무엇인지 정보를 수집해 오는 행위가 아니다.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언어와 언어 아닌 것들로 표현하면서 서로의 같음과 다름을 확인하는 과정이 바로 소개팅이다. 다시 12년 전의 첫 소개팅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면 “<카사블랑카>는 못 봤는데 어떤 영화인가요? 그리고 왜 좋아해요?”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양호경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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