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05 19:39
수정 : 2013.07.12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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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호경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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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판/연애] 양호경의 청춘 십자로
“저랑 만나보실래요?”
‘사귀자’고 말하는 것은 뭔가 유치해 보일 것 같기도 했고, 거절당하더라도 고백한 게 아니라는 방어기제가 필요했다. 그래서 세번째 만난 소개팅녀의 코트로 조심스레 공을 넘겼다. 밋밋하게 들어오는 공에 실망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어장에 두고 싶었는지 당시에는 알 수 없었지만 소개팅녀는 짐짓 제안의 의도를 모르는 듯 즉답을 피했다. “당신은 좋은 사람인 거 같아요. 잘 지내봐요”라며 다시 공을 나의 코트로 살짝 넘겼다. 난 거절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만나보고 싶은 마음에 “네, 우리 잘 지내요”라고 쿨한 척 받아넘겼다. 그렇게 사귀는 것도 아닌, 사귀지 않는 것도 아닌 0과 1 사이의 어중간한 관계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사귀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어중간한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일이 없는 주말에 영화를 같이 보거나 하는 연애의 설렘도 있었다. 거기다가 명확하게 사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소개팅을 나가거나 다른 이성과 연락하고 지내는 것에 대한 미안함도 들지 않았다. 한번은 연애에 가까운 0.79로 갔다가 다른 때는 그냥 친구에 가까운 0.36으로 가는, 의무나 구속도 없지만 연애 감정을 가질 수 있는 편한 관계라고 생각했다.
한주에 한번 혹은 두주에 한번 만나고, 하루나 이틀에 한두번 연락하는 관계가 석달 가까이 지속되었다. 그렇게 0과 1의 어중간한 관계에 익숙해지던 어느 날, 술기운이 약간 오른 그 여자는 나에게 화내듯 물었다. “왜 당신은 석달 넘게 만나면서 나에게 사귀자고 이야기하지 않는 거죠?” 난 당황스러웠다. ‘나의 사귀자는 제안을 거절한 것은 당신이고, 0과 1의 어중간한 관계를 만들고 즐긴 것은 당신이 아니냐’고 반박하고 싶었다. 당시에는 난 연애를 하고 싶었던 다른 사람이 있었고, 결국 그 술자리를 끝으로 그 여자와 연락을 더는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긴가민가한 관계를 즐겼지만 소개팅녀는 3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여전히 나와 소개팅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개팅으로 연애를 시작하는 시간차는 다양하다. 친구들 중에 처음 만난 날부터 불꽃이 튀어 2시간 만에 사귀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반대로 한달에 한두번씩 연락을 주고받다가 1년 만에 연애를 시작하는 경우도 있다. 3번에서 5번의 만남 사이에서 사귈지 말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하지만 분명 모든 연애는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고백은 평등한 협상장에 앉아서 서로 갖고 있는 패를 하나씩 펼치는 게임이 아니다. “연애 할래? 말래?”라는 협상이 아니라 강대국과 약소국의 불평등한 관계처럼 ‘당신을 좋아하니 제발 사귀어 주세요’라는 입장에서 시작된다(표현은 덜 비굴하게 할 수는 있겠지만). 연애는 50과 50의 합이 아니라 불균형한 30과 70의 마음의 합이 만나야 시작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중간한 관계는 결국 0과 1의 어딘가로 수렴된다. 그리고 혼신의 힘을 다해 던져야만 1이라는 수에 도달할 수 있다.
양호경 청년유니온 정책기획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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