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소설 <2화>
옥중에서 쓴 자서전 《안응칠역사》에서 안중근 의사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유리를 만났다고 썼지만, 유리 최의 《여순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장소는 우수리스크의 한인 개척촌인 유성촌이었다. 여러 정황으로 보건대 안 의사가 자서전을 쓰면서 착각했던 것 같다.
우수리스크는 블라디보스토크와 하얼빈을 잇는 기차가 통과하는 작은 마을이다. 안 의사와 우덕순 선생은 이토 히로부미가 러시아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암살을 결심한 뒤 1909년 10월 21일 기차를 타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났다. 두 사람은 유동하 선생과 수분하(포그라니치나야)에서 합류할 예정이었으나 열차 안에서 러시아군 병사들이 갑자기 검문검색을 하는 걸 보고 짐 속의 권총 석 자루와 탄환이 들통 날까 염려해 우수리스크에서 내려 그곳에서 하루를 묵었다.
안 의사는 자서전에서 ‘유리 최라는 이곳 신부가 러일전쟁에 참전했고, 개척민들이 감자를 훔친 유랑민을 두들겨 팰 때 그 사이에 뛰어들어 유랑민 대신 얻어맞다 급기야는 주민들과 싸움을 벌였다는 이야기를 여관에서 듣고 호기심이 생겼다’고 썼다.
“그런 고해는 받아들일 수 없소. 앞으로 저지를 일에 대해 미리 성사를 줄 수도 없을뿐더러, 어떤 경우에도 살인은 아니 되오. 사전에 용서를 구한다는 것은 우선 앞으로 벌일 일이 대죄라는 사실을 도마(토마스) 형제가 알고 있다는 뜻이고, 두 번째로 지금의 참회가 진심이 아니라는 의미요.”
“최 신부는 황제 폐하를 강제 퇴위시킨 저 도적의 흉악함을 모른단 말이오, 아니면 우리 이천만 동포가 이대로 계속 신음하며 살아야 한단 말이오? 칼을 든 강도가 집에 들어와 아내와 누이를 위협해도 가만히 있겠소?”
처음에는 탄식조였던 응칠의 목소리에 나중에는 노기가 어렸다. 응칠은 불같은 사내였고, 유리 최 역시 그랬다.
“아내와 누이를 지키되 그 강도도 다치지 않게 하라는 게 그리스도의 가르침이오. 게다가 지금 이토 하나를 없앤다고 달라질 일이 뭐가 있겠소? 그자가 죽는다고 일본이 무너지겠소?”
“모두 비겁하게 그런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조선의 운명이 이 지경에까지 이른 것 아니오!”
응칠은 핏대를 올리며 테이블을 내리쳤다.
“성경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도 있고, 가이사의 일은 가이사에게 맡기라는 가르침도 있소. 토마스 형제의 충정은 이해하지만 그 방법은 잘못되었소. 설사 이토가 죽어서 우리 민족이 외세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 해도 그를 죽여선 안 되오. 금품이 탐나 사람을 죽이는 일과 다를 게 없소.”
“국권 회복을 한낱 금붙이에 비유할 수 있는 건 필경 조국의 현실에서 멀리 떨어져 여유 있게 살면서, 대국의 신부라는 신분으로 차별을 경험한 적도, 압제를 겪은 적도 없어서일 거요. 개척민들이 유랑민을 폭행할 때 그 사이에 끼어들어 맞지 않아도 될 매질을 당하셨다 들었소. 그런 작은 일에는 끼어들면서 왜 큰일은 눈감고 있는 것이오? 작은 동네에 너무 오래 살아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는 것 아니오?”
“나도 한때는 군인이었소. 일본군과 두 번 싸웠소. 나는 평안남도 용강 사람이오. 갑오년에 전란이 일어났을 때 인내천(人乃天) 정신에 공감해 홍기조 창의대령 밑으로 들어갔다가 전세가 기울어졌을 때 간도로 도망쳐 왔소이다. 러시아에 귀화했지만 내가 조선인이라는 사실을 잊은 적은 한 번도 없었소. 동학전쟁에서 도망쳐 나온 것이 부끄러워 간도관리사 이범윤이 러일전쟁에 참전할 군인을 모을 때 자원했소. 이범윤은 그게 황제의 칙명이라고 하더이다.
조선인 부대는 러시아 아니쉬모프 장군의 부대와 연합해서 뤼순에서 싸웠소이다. 러시아군은 일본군보다 구만 명이나 병사가 많았지만 정신력에 문제가 있었소. 특별조선인중대는 더 말이 되지 않았소. 서울에서 보내온 총 백 자루를 병사 일천 명이 나눠 써야 할 지경이었소. 무기가 부족했기 때문에 조선군 병사들은 주로 일본군의 포격을 받고 부서진 보루를 보수하는 일에 투입됐소.
나는 이번에는 도망치지 않았소. 그래서 뤼순에서 일본군에 붙잡혀 심한 고문을 받았소. 삼 일은 묶여서 개처럼 얻어맞고, 그다음 삼 일은 거꾸로 매달려 맞았소. 일본군은 조선인 짐꾼들을 많이 데리고 다녔소. 그들은 내가 조선인인 걸 알면서도 처벌이 두려워 내게 물 한 모금 주지 않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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