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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7 09:48 수정 : 2013.07.25 10:54

장강명 소설 <3화>



구타하는 자들은 자신들이 포로를 왜 때리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정보나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매질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저 자기 전우들이 죽고 다친 데 대한 분풀이였다. 러시아 장교나 군인에게 매질을 하기는 보복이 두렵고, 조선인은 만만했다.

“그런데 나 역시 내가 여기서 왜 매질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소.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를 집어먹기 위해 자기들끼리 벌인 전쟁이었소. 여기에 왜 조선인들이 끼어들어 러시아를 도와야 한단 말이오? 나는 칙명을 내린 황제의 뜻이 궁금해졌소.

초주검이 되어 뤼순 길바닥에 버려진 나를, 길을 가던 러시아정교 신부 한 분이 거두어주었소. 주교를 따라다니며 죽은 병사들에게 성사를 내려주는 일을 하던 신부였소. 랴오양의 성당에서 서서히 몸과 마음을 회복했소. 성당 일을 거들어주며 바깥소식을 들었소. 러일전쟁에 대해 일본군은 아시아 나라로는 처음으로 백인 국가를 물리쳤다며 자랑스러워하고, 러시아군은 비록 졌지만 명예로운 패배였다고 선전하는 꼴을 보려니 기가 찼소.”

손님은 주인의 말을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거의 마시지 않은 차는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주인은 말을 이었다.

“랴오양에서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소. 나는 조선 여론이 황제는 탓하지 않고 박제순과 이완용 등을 오적이라 하여 비난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소. 조선은 군주전제국 아니오? 왜 조선인들은 황제의 책임은 눈감아 주면서 다섯 대신만 욕하는 거요? 대한에 충성을 바치는 것이 황제를 섬기라는 뜻이오? 대저 대의라는 게 다 그렇더이다. 나는 먼 데 있는 대의는 믿지 않기로 했소.

아까 내가 유랑민을 대신해 이곳 주민과 싸운 이야기를 말씀하셨는데, 그 유랑민이 아까 이 자리에 차를 내놓은 저 계집아이요. 저 아이가 제 남동생과 함께 이 마을에 와서는 며칠 동안 음식 쓰레기를 주워 먹고 남의 집 지붕 아래서 자는 노숙 생활을 했소. 마을 사람들 모두 저 남매가 며칠째 그렇게 굶는 걸 보고 있었소. 남동생은 고작해야 예닐곱이나 됐을까 싶은 나이였소.

어느 날 길을 가다 보니 마을 사람 서넛이 저 아이들을 쓰러뜨려 놓고 몽둥이찜질을 하고 있더이다. 사내아이가 씨감자를 훔쳐 먹었다는 이유로 말이오. 아이들이 진짜로 도둑질을 했는지 나는 모르오. 다만 매질이 한 시간이 지나도 멈추지 않기에 ‘이제 그만들 하라’고 끼어들었다가 매질의 목적이 다른 데 있는 것을 알게 되었소.

저 계집아이가 얼굴이 반반하오. 남자들은 계집아이가 몸으로 감자 값을 갚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오. 매질을 하던 어른 중 하나가 계집아이를 끌고 가려 하자 남동생이 그 앞길을 필사적으로 막아섰소. 어른이 남동생의 배를 발로 걷어찼고 사내아이는 제대로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고꾸라졌소. 그때 내가 나서서 마을 주민들과 주먹다짐을 벌였소. 그리고 아이들을 이 집으로 데려왔소. 남동생은 몇 달 살지 못했소. 이 집에 오던 날 맞은 탓인지, 원래 몸이 허약했던 탓인지는 모르겠소. 안 공께서는 이토를 죽이는 일과 저런 남매를 살리는 일 중 어느 쪽이 더 중하다고 보시오?”

긴 이야기를 듣는 동안 남폿불에 비친 응칠의 얼굴에는 별 표정 변화가 없었다. 응칠은 질문 하나를 던졌을 뿐이다.

“얘기인즉슨…… 그대는 사제가 아니로군?”

“정식 서품은 받지 못했소. 부제 교육을 받았소이다.”

“시간 낭비 했구려.”

응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유리는 낭패감을 느꼈다. 간도에는 실제로는 하는 일도 없으면서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서로 동지니 지사니 하고 부르며 이토나 스티븐스, 이완용을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허풍을 치는 실없는 자들이 많았다. 유리는 상대가 자신과 계집아이의 기구한 운명 이야기에도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정신이 강하고 단련된 인물인 줄 몰랐다. 유리 최의 집을 나서는 응칠의 눈빛은 차분했다. 번민과 고뇌가 없는, 무인(武人)의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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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강명의 <유리 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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