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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18 10:53 수정 : 2013.07.25 10:54

장강명 소설 <4화>



연해주의 시월은 한겨울이다. 응칠이 떠난 뒤 유리는 아궁이의 불을 한참 쳐다보며 깨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응칠에게 말하지 않은 일에 대해 생각했다. 러일전쟁에 참여한 조선군 병사들 역시 일본 포로를 고문했다. 간도로 쫓겨난 조선인들은 모두 일본인을 미워했고, 특별조선인중대는 전선에서 할 일이 별로 없었다. 요새사령관 스미로노프는 치사한 전술로 전쟁에서 이기느니 차라리 영예롭게 지는 게 낫다고 생각하는 구식 군인이었다. 그래도 조선군 병사들이 일본인 포로를 구타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백인이 하기에는 불명예스러운 일이라도 아시아인들끼리는 할 수 있다는 식이었다.

일본군 병사들은 그를 거꾸로 매달고 죽도록 때렸다. 유리는 반드시 살아남아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증오에는 대상의 이름이 필요했다. 두 눈이 뭉개지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젊은 유리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일본군 병사들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적개심을 모두 이토 히로부미에게로 돌렸다. 그런 복수심은 애국과는 아무 관련이 없었다.

정교회에 입문한 뒤에도 고문의 기억과 당시의 다짐은 이따금 떠올라 그를 괴롭혔다. 유리는 자신이 평생 그 기억에서 벗어날 수 없으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한밤중에 갑자기 웬 이방인이 불쑥 찾아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이러 가는 길인데 고해 성사를 해 달라”고 요청한 것이 기이하게 느껴졌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테이블에는 그가 수도 없이 읽었던 《톨스토이 소설집》이 놓여 있었다. 그는 그중에서도 〈사랑이 있는 곳에 신이 있다〉는 제목의 단편을 좋아했다. 아내와 자식을 잃은 구두장이에게 어느 날 ‘내일 내가 찾아가겠다’는 예수의 목소리가 들린다. 다음 날 추위에 떠는 청소부나 아기를 안은 여인, 날품팔이 할머니, 소매치기 소년 등이 구두장이를 찾아온다. 구두장이는 그들에게 밥을 먹이고 몸을 데우게 한다. 그날 밤, 자신이 대접한 사람들의 얼굴이 하나씩 구두장이 앞에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게 나였노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유리는 이방인이 자신에게 했던 말을 생각해보았다. ‘칼을 든 강도가 집에 들어와 아내와 누이를 위협해도 가만히 있겠는가?’ 지금 누가 내 아내이고 누이인가? 어떤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겠다는 말을 들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살인을 당할지 모르는 사람이 나와 민족의 원수라고 해서 그 살인을 묵인해야 하는가?

유리는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 집 안을 몇 바퀴 돌았다. 신이 그에게 시험을 내려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는 내 가르침대로 원수를 사랑할 수 있느냐? 그 원수가 이토 히로부미라 해도?

자신이 져야 할 십자가의 정체를 깨닫고 나니 온몸이 저리는 듯했다. 그는 게세마니 동산에 오른 예수를 생각하며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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