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소설 <5화>
계집아이는 잠귀가 밝았다. 그가 방문을 열자 흠칫 놀라며 몸을 일으켰다. 계집아이는 쓰지도 않는 촛대를 머리맡에 두고 잠을 잤는데, 그 촛대를 호신용 무기로 여기는 듯했다. 그는 나타샤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았다. 계집아이는 자신들이 마을 사람들로부터 얻어맞고 있을 때 유리가 처음부터 끼어들지 않고 한동안 폭행 현장을 방관했다는 사실 때문에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유리가 “사나흘 여행을 갈 것이다, 당분간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자세한 정황은 밝히지 않고 용건을 말한 뒤 손에 몇 루블을 쥐여주는 동안 나타샤는 입을 벌리고 바보처럼 듣고만 있었다. 유리는 토끼털로 만든 방한모를 눌러쓰고 집을 나섰다.
여관집 문을 두드리자 사람을 맞으러 나온 이는 하필 그 집 아들이었다.
“뭐요?”
“여기 황해도 말씨 쓰는 사람이 묵고 있는지 알아보러 왔소. 콧수염을 기르고, 두루스케(러시아식 외투)를 입고, 왼손에 손가락 한 마디가 없는 자요.”
여관집 아들은 하늘을 쳐다보며 딴청을 부렸다.
“그자가 지금 있소, 없소?”
“가짜 신부에게 그런 걸 알려줘야 할 이유가 없을 거 같은데…….”
“사람 생사가 걸린 문제요!”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큰 유리가 멱살을 움켜쥐자 여관집 아들은 깜짝 놀라 몸을 움찔했다.
“이미 갔소, 그 사람들은! 첫차를 타야 한다고 한 시간 전에 떠났소!”
유리는 멱살을 풀고 여관집 아들에게 응칠과 동행이라는 다른 인물에 대해 물었다. 여관집 아들은 그에 대해 이름은 모르며 키가 육 척 장신이라고만 했다.
사실 그 시각까지 안 의사와 우덕순 선생은 여관에 있었다. 여관집 아들이 안 의사의 거사를 돕기 위해 거짓말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골치 아픈 가짜 사제와 자기 손님들이 마주치면 싸움질이 벌어질 것 같아 자기 집에서 쫓아내고 싶은 마음이 반이었고, 유리에 대한 반발심에 ‘엿 먹으라’는 심정으로 거짓말을 한 측면도 있었다. 우덕순의 신상 묘사도 모두 거짓이었다. 그래서 유리는 기차 안에서 우덕순을 마주쳤음에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유리 최와 안응칠, 우덕순은 우수리스크에서 아침 여덟 시에 출발한 우편 열차에 다 같이 올랐으나 서로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유리 최는 삼등칸에, 안응칠과 우덕순은 검색을 피하기 쉬운 이등칸에 탔다.
정작 안 의사와 우덕순 선생은 하얼빈으로 가는 길에 러시아와 만주의 국경지대인 포그라니치나야에서 내렸기 때문에 하얼빈에 먼저 도착한 것은 유리 최였다. 안 의사 일행은 그곳에서 한약방을 운영하며 독립운동가를 지원했던 유경집을 찾아갔고, 여기서부터 유경집의 아들인 유동하 선생이 수행원으로 따라오게 된다.
22일 아침부터 의거가 있었던 26일 아침까지 닷새 동안 유리와 안 의사의 동선은 묘할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엇갈린다.
‘앞으로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를 상대로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될 것이다. 길게 봐서 어떤 것이 이득이 될지 곰곰이 따져야 한다.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이끄는 육군은…….’
이토는 거기까지 쓰고 야마가타 아리토모라는 이름을 그대로 둬야 하나, 아니면 빼야 하나를 망설였다. 밤이었고, 청나라의 전기 사정은 별로 좋지 않았다. 그는 침침한 눈을 손가락으로 비비고 방금 쓴 부분을 촛불에 꼼꼼히 태웠다. 그런 뒤 타다 만 편지지를 버리고 새 종이를 두 장 꺼냈다. 한 장은 아들 분기치에게, 다른 한 장은 조선인 양녀 배정자에게 보낼 편지를 적기 위한 용도였다. 배정자에게 발송할 서한을 먼저 썼다. ‘네가 걱정해주는 덕에 나는 건강히 잘 있다. ……말타기와 총 쏘기를 더 연습하고 조선의 청년을 많이 만나라.’
편지 내용과는 달리, 환영 만찬에서 먹은 청요리 때문에 위가 더부룩하고 체증 기미가 있었다. 낮에는 푸순 일대의 탄광을 둘러보았는데 거기서 그는 기침을 너무 많이 하는 바람에 비서관에게 몸을 기대야 할 정도였다. 몸 이곳저곳이 아팠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가 위태롭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육군은 그를 겁쟁이라고 불렀다. ‘조선은 을사늑약과 정미칠조약으로 외교나 내정에 있어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태다, 당장 합방을 추진할 필요는 없다’는 이토에 대해 야마가타는 ‘남만주 정벌을 위해서는 병참선 확보가 가장 시급하다’고 맞섰다. 그러기 위해서는 빠른 시일 내에 한일 병탄을 해야 한다는 논리였다.
우리가 만주를 넘봐야 하는가? 조선을 제대로 소화하기에도 일본의 역량은 부친다. 분기치에게 쓰는 편지는 점점 그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는 고백의 자리가 되고 있었다. 러시아는 청나라에서 만주를 다시 빼앗아오는 걸 묵인하는 조건으로 일본의 조선 지배를 지지하리라. 하지만 러시아에게 남만주까지 넘겨준다면 내각의 군벌 세력들은 그걸 빌미 삼아 자신을 공격할 것이다.
멀리서 들려오는 기적 소리에 그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역에 정차된 귀빈열차 앞으로 동청열도의 선로가 뻗어 있었다. 들판을 가로지르는 열차의 길은 어둠 속으로 이어져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 어둠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만주에서, 조선에서, 일본의 미래에서 그만 물러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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