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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7.22 09:40 수정 : 2013.07.25 10:53

장강명 소설 <6화>



‘이등, 노서아 재무대신 꺼깝체프 만나러 봉천역 출발.’

유리가 하얼빈 역에서 산 한인신문 <원동보>에는 ‘이토 히로부미가 코코브체프를 만나러 동청철도 특별열차 편으로 24일 선양을 출발했으며, 25일 관성자(장춘)를 거쳐 26일 하얼빈으로 향한다’는 기사가 나 있었다. 우수리스크를 떠나온 지 사흘째였다. 이토가 오는 날까지 기다리면 닷새가 된다. 계집아이가 혼자서 잘 지내고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앞으로 이틀만 더 있으면 이토가 암살을 당하건 말건 ‘하는 데까지는 했다’고 자부하며 집에 돌아갈 수 있다. 그 위안을 얻기 위해 여행에 나선 자신이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이 자신이 생각하듯 쉽게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안한 예감도 들었다. 그는 하얼빈에서 안응칠 일행을 만나 신고하겠다고 협박하거나 중간에 붙잡아 두는 것만으로 살인을 막을 수 있게 되기를 기도했다.

하얼빈에 와서는 항일단체인 공립회 회원 행세를 하며 돌아다녔다. ‘콧수염을 기르고, 왼손 손가락이 하나 없으며, 응칠이라는 이름을 쓰는 사나이’에 대해 수소문하던 중 공립회 하얼빈지부 사무실에서 ‘단지회’라는 비밀결사에 대해 들었다. 그해 2월에 과격파 몇몇이 연추(노브키에프스크)에 모여서는 ‘앞으로 삼 년 안에 이토와 이완용을 죽인다, 그러지 못하면 자결한다’고 맹세하며 순번을 정해 왼손 손가락을 잘랐다는 얘기였다.

유리는 하얼빈의 동방정교 교당에 머물렀다. 이토 도착을 앞두고 역 주변은 벌써부터 러시아 철도경비대의 검문검색이 삼엄했다. 문득 자신의 집에 왔을 때 응칠이 러시아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자들은 러시아어 통역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통역을 구하고 싶다면 어디로 가야 할까? 유리는 한인들이 세운 동흥학교를 찾아갔는데, 거기서 동흥학교 설립자이자 교장인 김성백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레스나야 가(街)에 있는 김성백의 집에 가면 어지간한 독립운동가의 소식은 대충 다 들을 수 있다고 했다.

다음 날 유리가 김성백의 집을 찾아가니, 이른 저녁임에도 식객들이 중국술을 마시고 얼근히 취해 있었다. 유리는 “간도에서 십 년 이상 독립투쟁을 해온 공립회 회원”이라고 자신을 속이고 그 자리에 어울리다가 “단지회원 안응칠이 그렇게 명사수라는데 만나서 사격 솜씨를 겨루고 싶다”고 떠들었다. 그는 제일 말석에 앉은 청년 하나가 자신을 흘끔흘끔 쳐다보고 있음을 깨달았다.

청년은 집주인의 사돈인 유경집 집안의 아들로, 이름은 동하라고 했다. 유리는 “나도 몇 달만 더 빨리 만주로 왔더라면 단지회에 가입했을 텐데, 이놈의 손가락이 거추장스럽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쥐 도적놈이 눈앞에 오는데도 아무런 일도 못 하고 그 꼴을 지켜봐야 한다니……. 그 생각만 하면 자다가도 머리털이 곤두서더이다. 유 동지는 아무렇지도 않소?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는 일본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은 무리다, 인민 교육이 먼저라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는데, 유 동지도 그런 의견이요?”

“총을 쏠 사람을 키워내지 못하는 교육을 어디에 쓰겠소.”

두 사람은 이어 브라우닝이니 마우저니 루거니 하는 권총 이름을 주워섬기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신이 나서 각 총의 장단점을 열거하는 유동하는 총기에 대한 지식이 많았지만, 실제로 써본 경험은 적었다. 유리는 러일전쟁 당시의 경험을 말하며 으스댔다.

“확실히 제원에 대해서는 유 동지가 아는 게 많은 듯하나 이는 호랑이를 본 적 없는 화가가 상상으로 그리는 그림과 비슷하다 할 수 있소. 브라우닝은 탄알이 커 살상력이 좋긴 하나, 반동도 만만치 않아 총을 쏘고 나면 매번 조준을 다시 해야 하오. 이토 주변에는 언제나 경호원들이 있을 텐데 첫 발에 저격에 성공하지 못하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으니 아주 가까이에 있는 사람을 쏘는 데야 모를까, 이토 암살용으로는 적절치 않은 기구요.”

“최 공은 하나만 알고 다른 하나를 모르십니다. 대저 무기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쓰면 되는 것이지, 승냥이를 잡는 데 적합한 총이 따로 있고 사슴을 잡는 데 어울리는 총이 따로 있는 게 아닙니다. 하얼빈의 경계가 삼엄해 두 발, 세 발을 쏘기 어렵다면 한 정거장 앞으로 가서 채가구(차이자거우)에서 일을 치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코코브체프가 안 나오니 러시아 경비병은 그만큼 적지 않겠습니까.”

“안응칠 일행이 차이자거우로 갔소?”

새파랗게 질리는 유동하의 얼굴을 유리는 놓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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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장강명의 <유리 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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