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조부치에게는,”
밤이었다. 안중근이 벽 너머로 말했다. 중근은 형무소에 수감될 때부터 사형수용 독방을 쓰고 있었다. 유리는 귀가 어두운 늙은 도둑과 한방을 썼다.
“그대는 나와 관련이 없는 인물이라고 말해놓았소. 내 거사를 가로막고자 그런 행동을 벌인 것이라고.”
“나도 검찰관에게 그렇게 진술했소. 그러나 내 말을 안 믿는 것 같더이다. 러일전쟁에 참전한 경력 때문인 듯하오.”
“유성촌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들었소.”
유리는 한동안 답하지 않았다. ‘살인을 막기 위해 거짓으로 자수했다’는 말을 검찰관은 믿어주지 않았고, 유리는 이후 취조에 급격히 관심을 잃었다. 그랬던 그도 증거를 찾으러 유성촌으로 갔던 수사관이 그의 집이 텅 비어 있는 사실만 확인하고 돌아왔다는 소식에는 “거기에 계집아이는 없었소?”라며 반응을 보였다. 검찰관 미조부치 다카오는 수사관을 우수리스크로 다시 보내 사정을 알아보게 했다. 수사관은 “마을 사람들 이야기에 따르면 기차역 근처 여관집 주인 아들이 계집아이에게 오랫동안 눈독을 들이고 있던 중 유리가 집을 비우자 그 틈을 타서 음욕을 채웠고, 아이는 얼마 뒤 집을 떠났다고 한다”고 보고해왔다.
유리는 검찰관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감방에 돌아온 뒤 귀 어두운 늙은 도둑이 잠을 잘 때 소리 죽여 울었다. 그는 천주에게, 구두장이에게 모습을 드러냈듯이 자신 앞에도 나타나 어떤 설명을 해달라고 빌었다. 그러자 예수 대신 감옥 벽의 갈라진 금과 얼룩이 마귀의 형상으로 떠올라 그에게 속삭였다. “그게 나였노라, 그게 나였노라…….”
죽음을 간절히 원했지만 자살은 금지돼 있었다. 유리는 독방 생활을 하지 않는 우덕순이나 조도선이 식사나 체련 시간에 자신을 공격해 죽여주길 바랐다. 그러나 그들은 입으로는 유리에게 온갖 저주와 욕설을 퍼부으면서도 직접 위해를 가하진 않았다. 유리는 자신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다른 사람이 살인을 저지르길 빌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신께 용서를 구했다.
“누구에게 그 이야기를 들었소?”
유리가 물었다.
“사카이 경시가 붓글씨를 부탁하며 전해주더군.”
“그자를 믿지 마시오. 대한제국 내부(內部)에서 근무하다가 특별히 그대를 담당하기 위해 이리 파견된 인물이오. 그대에게 살갑게 구는 것은 자결을 막고 가능하면 전향을 시키기 위해서요.”
“나는 자결하지도, 전향하지도 않소.”
중근은 껄껄 웃으며 대답했다. 유리는 그런 상대방의 여유가 부러웠다.
“뮈텔 대주교가 토마스 형제를 파면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종부성사도 베풀지 않겠다고……. 나는 천주교회는 아니나 정교의 부제 교육을 받은 사람이오. 여차하면 내가 종부성사를 해줄 수도 있소.”
“사양하겠소. 거사의 의미도 모르는 자로부터 성사를 받고 싶지는 않소.”
유리는 “죄 사함은 내가 아니라 천주가 하오”라고 말했지만 중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중근이 다시 원래 쓰던 방으로 돌아갔을 때 황해도 신천본당의 빌렘 신부가 뮈텔의 지시를 어기고 뤼순 감옥으로 왔다. 빌렘은 안 의사에게 종부성사를 베풀었으며, 다음 날에는 안 의사를 복사 삼아 감옥 안에서 미사를 집전했다. 이 자리에는 사카이와 구리하라 감옥장을 비롯한 형무소 간부들이 여럿 참여했다. 재판 과정에서 한 번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던 안 의사는 마지막 미사 중에 살인죄를 뉘우친다고 고백했다.
안 의사가 처형된 날, 유리는 사카이로부터 교수형 집행 소식과 함께 안 의사가 성사를 받았을 때에 대해서도 들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결연함과 성사를 받으며 보인 신심, 사형수들이 뿜어내는 특유의 순결한 분위기가 어우러져 그 자리에 있었던 간수들이 이상할 정도로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유리는, 살인을 저지른 자는 구원을 받는데 왜 자신은 그러지 못하는가를 생각하고 질투심에 휩싸였다. 그해 8월에 일제는 한일합병조약을 강제로 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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