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강명 소설 <10화>
유리 최는 출소하고 난 뒤인 1914년에 안중근과의 만남과 하얼빈 의거 때 자신이 했던 일, 이후 뤼순 감옥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담은 《여순일기》를 썼다. 이 원고는 출판되지 못한 채 2011년 안중근 연구가인 김영근 선생이 발견할 때까지 하바롭스크 공업대학의 향토박물관 서고 한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이후 유리 최라는 이름은 기록된 역사에서 사라진다. 다만 유리 최로 의심되는 인물이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한 지 삼십 년이 지난 1939년의 신문 기록에 언급된다.
일제는 그해 10월 15일에 안중근 의사의 아들 준생을 조선호텔로 데려와 히로부미의 아들 분기치를 만나게 했다. 준생은 분기치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한다”고 말했고 분기치는 이를 받아들였다. 이 일은 당시 조선과 일본 언론 양쪽에 모두 크게 보도됐는데, 그중 <매일신보>와 <경성일보>에 최 신부라는 러시아 성직자가 나온다. <경성일보>에 따르면 이 자리에 준생을 데리고 온 사람이 최 신부라고 돼 있다. ‘망부의 사죄는 보국의 정성으로, 운명의 아들 안준생 이토 공 영전에 고개 숙이다’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최 신부는 “천주 앞에서 우리는 모두 똑같은 죄인일 따름”이라며 “두 사람이 서로 화해하길 진심으로 빈다”고 말한다.
1941년에는 안중근의 딸 현생이 남편과 함께 이토의 명복을 비는 사찰인 박문사를 참배했다. 그 자리에 유리 최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안중근 의사와 유리 최의 만남에 대해서는 김영근 선생의 《동양 평화를 지킨 안중근 장군》과 《코레야 우라!》에서 일부 대목을 참조했다. 안중근 의사를 만나기 전 유리 최의 행적에 대해서는 고려족중흥증회 기관지인 <한인민보>의 기록을 참조했다. 인물과 지명 표기는 처음 등장할 때에는 《안응칠역사》와 《여순일기》, <한인민보>의 표기대로 하고, 두 번째부터는 국립국어원 외래어표기법에 따랐다.
(이상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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