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6.12 19:43
수정 : 2013.07.24 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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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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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남자가 옛 연인을 떠올리게 되는 까닭은 대개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번째는 호르몬이 동한 경우이고, 두번째는 현재의 연애가 불만족스러운 경우다. 두번째의 이유로 남자친구가 옛 연인에게 연락했다면, 대부분은 그 남자 본인의 잘못이겠지만, 남자의 현재 애인도 약간의 책임이 있는 것 아니냐는 비겁한 이야기도 해 볼 수 있겠다.
단지 예뻐서 만난, 스물을 갓 넘긴 여자애가 있었다. 나이에 걸맞게 투정이 많았다. 만날 때에는 반드시 데리러 가야 했고 헤어질 때에는 반드시 데려다 줘야 했다. 어떻게든 그녀가 원하는 메뉴를 잘하는 음식점을 찾아야 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바로 대령해야 했다.
어느 날 그녀가 감자탕을 먹으러 가자고 했다. 서울 응암동 감자탕 골목에서 제일 유명한 집으로 택시 타고 달렸다. 고기를 몇 젓가락 집어먹다가 그녀는 또다시 짜증을 냈다. 왜 감자탕을 발라주지 않느냐고. 먹고 싶은 걸 참아가며 열심히 고기를 발라주었는데, 또 한 두어 번 집어먹더니 배가 부르다며 집에 가잔다. 참았던 화가 터져버린 나는 그녀에게 혼자 가라고 했다. 나는 먹고 갈 테니. 아니 내가 못 먹은 건 둘째 치고, 고기를 무한으로 리필 해 주는 곳인데 겨우 몇 조각 깔짝거리다 간다는 것이 나로서는 용납이 안 됐다. 돈이 얼만데.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씩씩거리며 나가는 모습을 본체만체하며, 나는 그렇게 혼자 감자탕 한 냄비를 다 먹었다. 터질 것 같은 배를 쓸어내리며 쓸쓸하게 빈 냄비를 보는데 돌연 한 가지 생각이 스쳤다. 내게도 감자탕을 발라주던 여자가 있었다는 것을!
감자탕을 시키면 앞 접시에 뼈 한 조각을 올려놓고 살코기만 살뜰히 발라내고는 그 접시를 내게 내밀던 장면이 떠올랐다. 그러고는 씩 웃는 게 참 예뻤다. 감자탕뿐만이 아니었다. 손 가는 음식은 죄다 먹기 좋게 손질해서 내게 내밀었다. 내가 맛있게 먹는 것을 보고야 자기 것을 먹던 여자였다. 동갑내기였음에도 엄마처럼 나를 세심하게 챙기고 그것에 행복해하던 여자였다. 그러나 그런 배려의 가치를 온전히 이해하기에는 날 두고 나간 어린 여자만큼이나 당시 나는 어렸다.
어린애들은 대개 연애할 때 상대가 부모처럼 구는 걸 고마워하기보다는 숨막혀한다. 친구들과 ‘위닝 일레븐’(2000년대 중후반 인기를 끈 플레이스테이션 게임)을 하고 있을 때, 밤늦게까지 술을 마시고 있을 때, 술이 덜 깬 오후에 방구석에서 기타를 치고 있을 때 연락이 되지 않는 나를 그녀가 걱정하는 게 귀찮아졌다. 그녀가 내게는 스트레스였고, 그녀에게는 짜증내는 내가 서운함이었다. 갈등은 잦은 다툼으로 이어졌고, 다툼에 지친 우리는 결국 헤어지고 말았다.
나는 그런 여자를 떠나보내고 이런 철없는 애를 만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감자탕 국물에 취하도록 술을 퍼부었고, 집에 돌아오는 택시에서 예전의 그녀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훗날 ‘백수와 조씨’의 <두 파산>이라는 앨범과 강백수 1집 앨범에 실리게 되는 ‘감자탕’이라는 노래를 썼다. 그리고 며칠 후 나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있을 때 잘해’라는 말이 흔한 이유는 흔한 만큼이나 그렇게 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루하루 부질없는 후회와 또 부질없는 노력으로 소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이제는 두어 살 더 먹었을 그 여자애는 자기에게 감자탕을 발라주던 남자가 있었음을 기억하지 않을까? 자기보다 어리고 철딱서니 없는 남자를 한 번쯤 만나 봤다면 잠깐이라도 내 생각이 났을 법도 한데 말이다.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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