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7.17 20:08
수정 : 2013.07.24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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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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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뮤지션의 스케줄은 농업인의 그것과 비슷하게 운영된다. 악천후에는 부득이하게 쉬어야 하는 것이 일단 비슷하고, 뮤지션의 공연철과 농업인의 농번기가 일치하기도 한다. 농업인들이 경작을 멈추고 휴식에 들어가는 겨울에는 뮤지션 역시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한가해진다. 작년 한 해 나는 100회 이상의 공연을 하며 바쁜 나날들을 보냈지만 겨울이 오니 홍대의 소규모 실내 공연장을 제외한, 소위 돈 되는 스케줄은 씨가 말라버렸다. 홍대 공연장들은 여러 여건상 뮤지션들에게 많은 공연료를 지급하지 못한다. 뮤지션들도 그 사정을 잘 알고 있으므로 ‘의리’로 공연을 제공하는 경우가 많다. 작년은 내가 음악으로 돈을 벌기 시작한 사실상의 첫해였으므로 젖과 꿀이 흐르던 봄철과 가을철의 행사비를 저축해 둘 생각은 당연히 하지 않았다. 일이 없으면 돈이 끊기고, 돈이 없으면 외출을 할 수가 없는 노릇. 하루하루 집에 붙어 있던 나는 그동안 미뤄두었던 편도선 수술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항상 목이 아파서 고생을 했다. 친구들과 잠을 자면 코골이가 심하다고 핀잔을 듣기 일쑤였는데, 그게 내 몸이 뚱뚱해서가 아니라 편도선이 뚱뚱해서였다는 걸 작년쯤 알게 됐다. 그래서 술을 마시고 웃옷을 벗고 자거나 조금 과로하면 편도선이 부어 음식도 잘 삼키지 못하고 공연에도 심각한 지장을 초래했다. 수술 이후 두어 달은 공연을 할 수가 없지만, 어차피 스케줄도 없을 바에 내년 봄을 위한 재정비를 하는 셈 치고 나는 수술대에 올랐던 것이다. 수술이야 어차피 자는 동안 이루어지므로 그 자체가 겁이 나는 건 아니었지만, 문제는 그 이후의 섭식에 관한 것이었다. 수술 부위의 출혈이 있을 수 있으므로 알갱이와 자극이 없는 밍밍한 유동식으로 최소 보름은 살아야 했던 것이다. 수술 12시간 전, 최후의 만찬이 고작 컵라면이었음을 나는 한 달 내내 후회했다.
수술 사흘 만에 허연 풀에 가까운 미음을 처음 마주했을 때에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황송했으나, 딱 두 끼 만에 지겨워졌고, 차가운 달걀찜과 바닐라아이스크림도 굶지 싶을 정도로 물렸다. 15년간 군만두로 연명한 <올드보이>의 주인공이 존경스러워졌다. 그리고 보름 후, 또다시 절망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병원 로비에서 텔레비전으로 <아빠 어디 가>를 보다가 ‘윤후’ 어린이의 먹방에 박장대소를 하다 수술 부위가 터져버리고 만 것이다. 수술대에서 다시 15일 이상 환자식을 먹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눈물마저 흘렀다. 너무 먹고 싶었다. 윤후가 먹던 ‘짜파구리’.
재수술을 하고 이번에는 닷새 만에 퇴원을 했다. 지겨운 환자식을 다채롭게 먹는 방법을 연구했다. 바나나를 갈았는데, 의외로 상처 부위에 바나나가 닿으면 따가웠다. 인스턴트 크림수프가 많은 도움이 되었다. 누가 엠에스지(MSG)를 나무랐던가! 자극 없는 식단에 엠에스지가 함유된 크림수프는 그야말로 은총과도 같았다. 상처를 가라앉히기 위해 먹는 바닐라아이스크림은 달면 오히려 금방 물린다. 차라리 우유를 각진 얼음 틀에 얼려 사탕처럼 녹여먹는 것이 덜 지루했다. 고구마를 으깨 우유와 섞어 먹는 것도 비교적 ‘음식 같은’ 기분이 들어 좋았고, 행여 이 ‘강제 다이어트’ 끝에 요요현상이 올까 봐 뒤의 일주일은 순두부와 초콜릿 맛의 단백질 셰이크로 연명했다.
약 40일 동안 14㎏이 빠졌고, 드디어 처음으로 일반식을 먹던 날, 목구멍을 미끄러져 내려가던 감자탕 고기와 맥주 한 잔의 자극에 대해서는 감히 이 미천한 글솜씨로 형용하지 않겠다. 청춘이여,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라!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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