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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8.07 19:43 수정 : 2013.08.08 10:13

강백수 제공

[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유명한 뮤지션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야심차게 낸 첫 이피(EP. Extended Play) 앨범은 대부분의 데뷔작들이 그러하듯이 망했다는 소식조차 알려지지 못할 만큼 참담히 망했다. 대학원에 가려 했으나 교수님들은 학부 졸업 성적 2.93의 낙제생을 한번에 받아주지 않으셨다. 불러 주는 데 없는 뮤지션, 대학원 재수생의 준말은 바로 백수. 아, 텔레비전에서나 보던 그 백수. 예명을 백수라고 지은 것을 후회했다.

어느 날 박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박 선생님은 고등학교 때 나의 영어 과외 선생님이셨으며 형처럼 따르던 멘토이시기도 했던 대형 학원 강사. 놀고 있다는 말에 선생님은 당신이 종합반 팀장으로 계시던 학원에 나를 취직시켜주셨다. 나는 중고등부 국어 강사가 되었다.

무대와 강단은 크게 다르지 않아서 강사 일을 하는 것이 적성에 맞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꿈꾸던 공연의 관객과 달리, 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억지로 학원에 앉아 있는 아이들의 얼굴은 자꾸 뒤로 미뤄둔 내 꿈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사명감과 비전을 갖고 강의하는 동료 강사들과 달리 마지못해 출퇴근할 뿐인 하루의 연속. 그럭저럭 벌었으나 삶이 허탈했다. 퇴근하는 밤마다 맘은 허무하고 배는 출출했기에 친구를 불러 술 한잔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으나, 경기도 용인에서 퇴근해서 서울 강서구 염창동의 우리 집에 돌아오면 시간은 이미 자정이었다. 그때 내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주곤 했던 음식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우동 한 그릇이었다.

아파트 입구에 저녁이 되면 작은 트럭이 한 대 선다. 우동과 짜장면과 만두와 어묵을 파는 분홍색 스낵카는 새벽까지 불을 밝히고 서 있다. 독서실 다녀오는 학생들, 장사를 마친 중년의 부부, 야근하고 돌아오는 고단한 직장인들에게 그 진한 국물 내음은 참기 어려운 유혹이다. 가격도 부담 없는 3천원. 사장님 내외가 잘 삶아진 면과 쑥갓 위에 뜨끈한 국물을 끼얹어 내면 혼자 온 이들은 말없이, 둘이 온 이들은 도란도란 서로의 하루를 이야기하며 한밤의 허기를 채운다. 나는 그들 틈에 말없이 서서 우동을 먹으며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좋았다. 이른 저녁 이후의 공복감보다 허기졌던, 이상과 멀어져가는 생활과 늦은 밤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달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결국 일 년 만에 학원을 그만두고, 다시 음악을 시작했고 대학원에도 입학하게 되었다. 차츰 불러 주는 무대도 생기고, 머지않아 학위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강사 시절만큼 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노래와 글로 밥을 벌어먹는 지금이 신기하고 즐거울 따름이다. 이제는 예전만큼 불안하고 외롭지 않게 되었다.

우동 트럭은 이제 주인이 바뀌어 다른 사장님 내외(사진)가 꾸려가고 있다. 하지만 그 맛은 변하지 않았다. 지금도 그때처럼 간절하진 않지만 가끔 그때 생각도 나고 출출하기도 해서 들러보곤 한다. 여전히 욕심 없는 사람들이 뜨거운 국물을 끓이는 곳. 야근을 하다가 지갑을 회사에 두고 퇴근하는 아가씨가 어묵 국물을 조금 먹고 가도 되냐 물으면, 매일 보는 사이에 무얼 미안해하냐며 외상 우동을 푸짐하게 내어주는 곳. 독서실에서 나온 수험생의 성적 고민에 처음 보는 대학생 형이 따뜻한 조언과 만두 한 판을 선물하는 그런 곳이 아직도 서울에 있다는 데 안도감마저 든다.

오늘도 술 약속이 있다. 피상적인 대화에 마음이 지치고 며칠째 계속되는 술자리에 위장이 지치면 또 그곳에 가야지. 3천원에 배부르고 서서 먹어도 가장 편안한.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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