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05 20:03
수정 : 2014.03.06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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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박미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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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속이 상했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위장이 상했다, 혹은 마음이 상했다. 오늘은 북엇국(사진)으로 상한 속을 달랬다. 빠짐없이 돌려주었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물건을 발견했다. 그녀 생각이 나는 아침. 북엇국에 해장술을 마신다. 위장을 달래고, 마음을 달랜다. 이것은 오래된 이야기이다. 그녀와 나는 한동네에 살았고, 술친구였다. 거의 매일 밤, 각자의 하루가 끝나고 함께 술잔을 기울였다. 서로의 옛 연인을 욕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푸념하고, 서로가 그래도 우리는 괜찮은 사람이라며 위로했다. 때로는 가볍게 마셨고 때로는 취했지만, 다음날 숙취가 있건 없건 우리는 아침에 다시 만나 함께 해장을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녀와 나의 집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것은 뜻밖의 이야기이다. 나는 남녀간에도 영원한 친구 사이라는 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런 게 가능한 사람이 있고 불가능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는 몇몇 여자애들처럼 그녀와도 마냥 친구로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어느 날 돌연 새로운 감정이 생기고 말았다.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관계가 달라졌지만, 실상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원래 함께 술을 마시고 해장을 하던 사이가 아니었던가. 표면적으로 달라진 것은 단지 술을 마시다 이따금 입을 맞추게 되었다는 것 정도. 처음에는 입술로 시작된 변화는 나의 마음에도 일어났다. 몇 달을 만나다 보니 돌연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를 매일 보는 것과 연인을 매일 보는 것은 미묘하게 달랐다.
그녀에게는 이해가 가지 않는 이야기였을 거다. 우리는 이전과 달라진 게 없는데, 나는 그렇게 매일 저녁과 아침을 같이하는 게 어느 순간부터 의무처럼 다가왔고 부담이 되어 버렸다. 그녀에게 만나는 횟수를 줄였으면 좋겠다고 말했을 때 그녀는 무척이나 서운해했다. 나의 부담과 그녀의 서운함은 늘 충돌했다. 우리는 결국 더 이상 밤의 술잔도 아침의 해장국도 나누지 않는 사이가 되었다. 연인이었고, 그 이전에는 친구였던 우리가 남보다 못한 사이가 된 것이다.
미안한 마음과 속상한 마음에 이별의 당연한 수순인 것처럼 술을 마셨다. 술을 함께 마셔 줄 친구들은 여럿 있었지만, 다음날 해장은 혼자 해야 했다. 습관처럼 그녀에게 해장하러 가자고 전화를 할 뻔했으나, 이내 내가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밥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북엇국을 배달시켜 먹으며 상한 위장은 달랠 수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걱정과 그녀가 없다는 허전함으로 상한 마음은 달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도 나처럼 나 때문에 술을 마시곤 하겠지. 닦달하지 않으면 귀찮다며 끼니를 거르곤 했던 그녀였던지라 걱정이 되었다. 속은 잘 풀고 다니는지. 더 이상 나는 그런 걱정을 할 입장이 아니게 되었지만, 속은 잘 풀고 다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혹여나 마주칠까 그녀와 자주 가던 순댓국집이나 돼지국밥집에는 가지 않기로 했다. 순댓국집은 그녀가 너무나 좋아하던 가게였고, 돼지국밥집은 그녀의 집 앞에 있었으니 두 단골 가게는 그녀에게 양보하기로 했다. 그녀가 전날 밤의 숙취와 끝난 연애의 숙취로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이야기이다.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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