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9.24 19:02
수정 : 2014.09.25 13:28
[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최근 하드디스크를 정리하다가 그동안 휴대전화로, 카메라로 찍었던 사진들을 보게 되었다. 2011년, 불과 3년 전의 사진을 보며 ‘이야, 저 때가 좋았어’라고 생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리고 3년 전에도 그전의 어떤 시절을 그리워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인생을 살면서 평생을 그리워할 어떤 시절이 청춘이라면, 어쩌면 그 평생이라는 시간 자체가 청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우리의 머리는 평생의 청춘을 다 기억할 만큼 영리하지 못하다. 그래서 마주하는 많은 대상의 틈새에 빼곡히 언젠가 다시 떠올릴 기억의 실마리를 숨겨둔다. 사진 속에 숨겨두기도 하고, 자주 입던 옷에 숨겨두기도 하고, 자주 읽던 책의 갈피에 끼워두기도 한다. 그리고 매일 마주하는 세끼 밥상에도 슬며시 얹어둔다. 어떤 음식을 마주하면 음식마다 다른 추억이 떠오른다. 그것을 나는 ‘청춘 식탁’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살아온 날이 얼마 전 일만 일을 돌파했다. 내게는 일만 일의 청춘이 있었고 하루 세끼 삼만 번의 ‘청춘 식탁’이 있었다. 그 맞은편에는 함께 웃고 울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때로는 고독이 있었다. 때로는 기쁜 마음이 그로 인해 더 기뻤고, 때로는 슬픈 마음을 그로 인해 위로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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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홍 작가의 <별놈>. 강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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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록 깨닫는 것은 삶이 녹록지 않다는 것. 녹록지 않은 삶을 하루하루 그럭저럭 견뎌낼 수 있게 해주는 내 인생의 모든 식탁에 감사하며, 이제 ‘청춘 식탁’의 이야기는 나 혼자 간직하려고 한다. 더불어 나와 같은 청춘 식탁들의 얘기를 마지막으로 첨부했다.
작년 4월, 서울 신림동 원룸에서 벗어나 성산동에 위치한 다가구주택으로 이사했다. 집이 제법 넓어지다 보니 친구들, 특히나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을 재워주는 일이 잦아졌는데 새벽까지 이야기꽃을 피우다 잠든 다음날 아침이면 밥솥에 밥을 올려놓고 동네 슈퍼마켓에서 콩나물 한 봉지와 두부 한 모를 사와 콩나물국을 끓인다. 아담한 국그릇에 막 된 새하얀 밥을 먼저 뜨고 정사각으로 작게 썬 두부와 표고버섯이 가득한 콩나물국을 끼얹고는 이미 수십 번 돌려본 영화를 보며 낄낄거리며 먹는다. 알 사람들은 다 알겠지만 그 맛보다 그 순간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이성혁(31·밴드 크랜필드 보컬)
매일 오후 한 시, 엄마가 콘티가 쌓인 책상에 놔주시는 4첩의 쟁반이 나의 식탁이다. 잠에 덜 깬 채 마주하는 밥. 깻잎무침과 두부조림, 콩밥. 그러다 양념게장이 있는 날은 원고를 노려보며 게걸스럽게 뜯는다. 들어가는 건 밥이요, 나오는 건 원고니 엄마가 엄마라서 다행이야. 만취(31·만화가)
내 청춘의 1년 반을 보낸 감옥, 그 안에서 어떻게든 밖에서의 맛을 재현해보겠다고 온갖 심혈을 기울여 만들던 음식들. 대부분이 구할 수 있는 재료 다 때려넣고 뜨거운 물에 쪄서 만든 것들이지만, 닳고 닳은 대가의 손을 거치면 그건 잠시나마 어느 후미진 골목 술집에 앉아 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주는, 프루스트의 마들렌 같은 것이 된다. 이길준(30·소설가) <끝>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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