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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22 19:57 수정 : 2013.07.24 10:14

김소민 기자 제공

계란에 대한 예의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계란 국장(國葬)이라도 치르는 걸까. 아침이면 독일인 베른트는 구멍이 세 개 뚫린 기계를 찬장에서 꺼낸다. 오직 계란만 앉을 수 있는 구멍이다. 그 옆엔 과학 실험실에서나 봤던 비커 모양 컵이 있는데 눈금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계란 개수, 반숙이냐 완숙이냐에 따라 따라야 할 물의 양을 보여주는 거다. 계란을 삶는 게 아니라 조립할 모양이다.

‘삑~’ 다 익었으니 모셔가라고 기계가 호령한다. 높은 온도에 계란이 터지지 않게 미리 껍데기에 옷핀으로 작은 구멍도 세공해 넣은 뒤다. 이제 계란만을 위한 의자에 앉힐 차례다. 계란 위에 옷도 입힌다. 베른트는 닭 모양과 곰돌이 모양 계란 옷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날 기분에 맞춰 고심해 고른다.

이제 그렇게 모신 계란의 모가지를 칠 차례다. 베른트는 나이프로 잘라 먹는데 레스토랑 같은 데 가서는 그렇게 먹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매너가 아니란다. 예의에 맞는 행동은 숟가락으로 톡톡 쳐 계란 머리통을 깨 먹는 거란다. 속살은 곧 죽어도 계란 전용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티스푼으로 먹으면 안 되냐니까 맛이 다르단다. 본인도 사실 모르면서 그냥 주장하는 거 같다. 다르긴 뭐가 다른가. 내가 편견 없이 수십 개 그렇게 퍼먹어 봤는데 똑같다.

계란을 먹는 거보다 쉬운 일이 어디 흔한가. 사이다만 있으면 그만인걸. 인생에서 몇 안 되는 아무렇게나 할 수 있는 일마저 꼭 이렇게 의식으로 승화시켜야 하는 이유가 뭐냔 말이다. 어쩌다 독일에 살게 된 지 8개월째, 가장 큰 문화 충격은 ‘계란 문명’이었다.

베른트의 손바닥 부엌엔 국자만 5개다. 생선을 굽는 석쇠는 꼭 생선 모양이어야 하나 보다. 이 많은 ‘특수 목적용’ 물건과 기계들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한번은 방에 나방이 들어왔는데 베른트가 기겁을 했다. 천장이 높아 사다리를 가져온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그 와중에 신발을 갈아 신고 있다. 혹시 미끄러질지 모르니까 사다리 올라가기에 알맞은 밑창이 깔린 걸로 꺼내왔다는 거다. 밑창별로 별별 신발이 다 있는 건 그렇다 쳐도 대체 나방을 잡자는 건가 말자는 건가.

아래층 남자 토마스는 ‘쓸데없이 정교한 물건’ 중독증인 거 같다. 하루는 허리를 조금도 구부리지 않고 꽃에 물을 줄 수 있는 물뿌리개라며 자랑스럽게 보여주는데 남의 돈이지만 아까웠다. 그 집에 어차피 화분이라곤 두 개뿐이다. 그 두 개 화분, 하필이면 평평한 데 다 놔두고 테라스 두 개 기둥 위에 아슬아슬 서 있다. 토마스의 자랑거리다. 그가 손수 만든 특수한 철사 구조물이 화분 아래쪽에 연결돼 있기 때문에 태풍이 불어도 떨어질 염려가 없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진짜 끄떡없었다. 다만 철사 고문 때문인지 꽃은 다 바짝 말랐다.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가끔 이웃 콜롬비아인 후안과 이해할 수 없는 독일인 베스트 5 이런 걸 꼽으며 속 풀이를 한다. 여기서 10년 산 후안이 그랬다. “이 사람들 벽에 구멍 하나 뚫는 데 장비 5개 필요하잖아.”

어찌됐건 일상을 괜히 복잡하게 사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계란을 그렇게 요란하게 먹다 보면, 뭔가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거다. 뭉턱뭉턱 지나가버리는 시간, 가끔 계란의 모가지를 복잡하게 내려치며 하루의 흔적을 남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자기 직전 되돌아 보면, 오로지 내 의지에 따라 한 일 하나는 또렷이 생각날 거 아닌가. 오늘 계란을 먹었다. 이렇게.

<한겨레> 김소민 편집부 일시적 독일생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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