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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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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독일인 마르크가 죽고 못 사는 게 세 가지 있다. 기린, 베트남, 그리고 코딱지만한 소품들이다. 이 세 가지 성물을 모신 신전이 그의 화장실이다. 여행 갈 때마다 챙겨온 베트남 자전거 모형, 연 날리는 소년상 등도 신줏단지로 모셔 놨다. 볼일 보는 순간만이라도 순전히 자기가 좋아하는 걸로만 이뤄진 오롯한 세계를 누리고 싶다는 몸부림인 셈이다.
마르크의 친구들 집에 놀러 가면, 집주인이 변신해 집이 된 경우가 많다. 아무래도 아파트처럼 앞으로 나란히 줄 맞춘 공간에서 살지 않으니 개성대로 융통할 여지가 있어 그런 것도 같다. 뭔 풍으로 꾸몄는지는 모르겠는데 집주인이 뭘 좋아하는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다.
그중 손님 올 때 가장 신경 쓰는 공간 중 하나가 화장실이 아닌가 싶다. 청소라면 학을 떼는 마르크도 누가 온다 싶으면 일단 쓰레기를 모두 자기 방으로 밀어 넣은 뒤 화장실 향초에 불을 붙인다. 향초를 담은 컵에는 아프리카 동물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그 덕에 촛불을 밝히면 벽에 그림자가 아른거린다. 사실 꾸민 정도로만 따지자면 화장실에서 대화를 하고 마르크의 방에서 똥을 눠야 맞다. 그 나긋나긋 흔들리는 촛불을 바라보며 변기에 앉아 있다 보면 똥을 누는 게 아니라 똥꼬로 예술작품을 빚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보헤미안이 되고 싶은 은행원 우버네 집 화장실은 히피다. 바닷가를 싹쓸이했는지 어디서 조개껍데기를 그렇게 주워와 주렁주렁 이어 달아 놨다. 첫아기 손바닥 자국이 남은 흰 진흙 장식품은 애교처럼 벽에 매달려 있다. 화장실 거울 테두리엔 흰 찰흙을 이어 바르고 그 위에 유리 조각들을 촘촘히 박았다. 이 집 애들을 동원해 만든 건데 모든 게 삐뚤빼뚤하다 보니 나름 리듬이 돼 그 화장실에 앉아 있으면 밥 딜런 노래에 맞춰 오줌을 눠야 할 거 같다.
사실 내가 이렇게 남의 집 화장실을 탐닉하게 된 건 말이 안 통해서다. 그 자체로 낯선 이에게는 충분히 잔혹한 파티 중에서도 으뜸으로 잔인한 것은 바로 스탠딩 파티다. 버벅거리며 돌아다니다가 사흘 굶고 길에 떨어진 주먹밥 발견한 심정으로 대화 상대 찾아내면 어느 참에 날쌘 인간이 끼어들어 나만 빼고 둘이 입에 모터를 켠다. 그럼 또 달랑 손에 쥔 술잔을 지팡이 삼아 휘청휘청 다른 대화 상대를 물색하는 거다. 이럴 때 독일어 프리존인 화장실은 눈물 나게 알뜰한 피난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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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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