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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6.19 20:18 수정 : 2013.07.24 10:14

김소민 기자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한스(77)와 크리스텔(75)의 금혼식 아침이다. 맏아들 베른트의 얼굴은 허옇게 떴다. 옛 사진 1만여장 중에 고갱이만 골라 감동의 스크린쇼를 하겠다더니 손톱만 잘근잘근 씹고 있다. 사돈의 팔촌, 이웃들까지 족히 40여명이 곧 덮칠 테다. 지난 8일 1박2일 쿵짝쿵짝 우르르의 서막이다.

이웃들한테도 잔치 동원령이 떨어졌다. 금혼식 당사자 집 정문 앞엔 초록색과 금색 꽃으로 장식한 철봉을 6개 엮어 캐노피를 만드는데 그건 이웃들 몫이다. 친한 이웃은 대개 저세상 사람, 남은 사람들도 관절통 신세라 이 부부 대놓고 말도 못하고 속 끓였다.

오고 가는 눈치 보기 속 우여곡절 끝에 선 캐노피 앞에 프리츠(85) 삼촌이 말갛게 서 있었다. 프리츠는 크리스텔의 조카의 남편인 먼 관계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부퍼탈에서 본까지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선물, 전화번호부, 주소록, 핸드폰, 꽃다발, 돋보기, 내비게이션, 지도 다 까먹고 몸만 왔다.

1차는 음식점에서다. 금혼식 주인공을 태운 차가 캐노피 앞에서 출발했다. 주소도 모르는 프리츠는 차로 따라오기로 해놓고 그새 길을 잃었다. 주인공들 타는 똥줄을 잡고 프리츠 찾느라 동네 몇 바퀴를 돌았다.

결국 프리츠를 포기하고 도착한 행사장 앞, 제 스크린쇼에 감동해 자기가 울어버릴까 걱정인 베른트는 멘트 외우기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6살, 9살 애들은 행사 시작 전에 서로 치고받으며 간을 봤다. 그 법석 중에 프리츠가 마법처럼 서 있었다. “그냥 좌회전을 계속했어.”

베른트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관객은 말똥말똥한데 발표자는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선물해줘 고마워요. 흑흑.” 한스와 크리스텔은 전쟁 난민이었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된 옛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가 고향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몸만 달랑 나와 맨땅에 집을 지었다. 그 마당엔 수지라는 토끼가 살았는데 살이 오르자 한스가 잡았다. 베른트가 잡아먹은 수지를 추억하며 선곡한 ‘왓 어 원더풀 월드’가 울려 퍼지는 사이 프리츠 삼촌은 디저트 메뉴에 정신이 쏙 빠졌다.

이어 노인 친구들은 음담패설 연극을 벌였다. 스태미나 친척들은 둘째 아들인 우버네서 2차를 벌일 채비를 했다. 한스는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가겠다고 우기고 베른트는 “먹을 거 천지인데”라며 구시렁거리는데 그 와중에 누군가 말했다. “프리츠 삼촌 어디 갔지?”

또 온가족 동네 몇 바퀴다. 프리츠의 회색차를 찾으러 동네 주차장은 다 도는데, 주차된 차 절반은 회색이다. 그새 한스가 우겨 싸온 음식들이 차 안에서 터졌고 베른트의 복장도 터졌다.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2차 우버네, 넷이나 되는 아이들을 동원해 집안 천장에 100여개의 종이하트를 달았다. 마당엔 로즈메리, 라벤더가 애들 손때에도 살아남았다. 한살인 막내 올르는 왁자지껄하거나 말거나 라일락 향기 흐드러진 마당을 기어 다니며 흙을 먹었다. 퀴즈와 잡담이 마당에 피운 장작과 함께 사그라지고 우버가 만든 바비큐가 바닥을 드러낼 즈음에야 프리츠에게 연락이 왔다. “운전면허증도 돈도 없더라고. 집으로 왔어. 그래도 길에서 오래 기다렸어.”

아이들은 2층 테라스 바닥에 담요를 깔고 하나둘 널브러져 잠이 들었다. 마당 껑충한 포플러나무들은 밤바람에 씩씩거리고 우버는 노래했다. “있는 그대로라고 사랑은 말하지.”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독일 연수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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