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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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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한스(77)와 크리스텔(75)의 금혼식 아침이다. 맏아들 베른트의 얼굴은 허옇게 떴다. 옛 사진 1만여장 중에 고갱이만 골라 감동의 스크린쇼를 하겠다더니 손톱만 잘근잘근 씹고 있다. 사돈의 팔촌, 이웃들까지 족히 40여명이 곧 덮칠 테다. 지난 8일 1박2일 쿵짝쿵짝 우르르의 서막이다.
이웃들한테도 잔치 동원령이 떨어졌다. 금혼식 당사자 집 정문 앞엔 초록색과 금색 꽃으로 장식한 철봉을 6개 엮어 캐노피를 만드는데 그건 이웃들 몫이다. 친한 이웃은 대개 저세상 사람, 남은 사람들도 관절통 신세라 이 부부 대놓고 말도 못하고 속 끓였다.
오고 가는 눈치 보기 속 우여곡절 끝에 선 캐노피 앞에 프리츠(85) 삼촌이 말갛게 서 있었다. 프리츠는 크리스텔의 조카의 남편인 먼 관계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부퍼탈에서 본까지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선물, 전화번호부, 주소록, 핸드폰, 꽃다발, 돋보기, 내비게이션, 지도 다 까먹고 몸만 왔다.
1차는 음식점에서다. 금혼식 주인공을 태운 차가 캐노피 앞에서 출발했다. 주소도 모르는 프리츠는 차로 따라오기로 해놓고 그새 길을 잃었다. 주인공들 타는 똥줄을 잡고 프리츠 찾느라 동네 몇 바퀴를 돌았다.
결국 프리츠를 포기하고 도착한 행사장 앞, 제 스크린쇼에 감동해 자기가 울어버릴까 걱정인 베른트는 멘트 외우기 벼락치기를 시작했다. 6살, 9살 애들은 행사 시작 전에 서로 치고받으며 간을 봤다. 그 법석 중에 프리츠가 마법처럼 서 있었다. “그냥 좌회전을 계속했어.”
베른트의 걱정은 현실이 됐다. 관객은 말똥말똥한데 발표자는 감동의 도가니탕이다. “아름다운 어린 시절을 선물해줘 고마워요. 흑흑.” 한스와 크리스텔은 전쟁 난민이었다. 지금은 러시아 땅이 된 옛 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가 고향이다. 2차 세계대전 때 몸만 달랑 나와 맨땅에 집을 지었다. 그 마당엔 수지라는 토끼가 살았는데 살이 오르자 한스가 잡았다. 베른트가 잡아먹은 수지를 추억하며 선곡한 ‘왓 어 원더풀 월드’가 울려 퍼지는 사이 프리츠 삼촌은 디저트 메뉴에 정신이 쏙 빠졌다.
이어 노인 친구들은 음담패설 연극을 벌였다. 스태미나 친척들은 둘째 아들인 우버네서 2차를 벌일 채비를 했다. 한스는 남은 음식을 싸가지고 가겠다고 우기고 베른트는 “먹을 거 천지인데”라며 구시렁거리는데 그 와중에 누군가 말했다. “프리츠 삼촌 어디 갔지?”
또 온가족 동네 몇 바퀴다. 프리츠의 회색차를 찾으러 동네 주차장은 다 도는데, 주차된 차 절반은 회색이다. 그새 한스가 우겨 싸온 음식들이 차 안에서 터졌고 베른트의 복장도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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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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