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08.21 19:36 수정 : 2013.08.22 10:56

니콜과 사비나, 김소민 기자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독일 한 영어학원 광고는 이랬다. 해양경비대 신참의 첫 당직 날이다. 되게 착한데 사고 칠 관상이다. 하필이면 그날 밤 영어로 쏼라거리는 급박한 메시지가 들어왔다. 그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영어를 ‘지렸다’. “여기는… 독일… 해양… 경비대…입니다.” 듣고 떨어지면 좋으련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저쪽에서 달려든다. “위 아 싱킹, 싱킹(우리 침몰한다 we are ‘sinking’). 뭐라는 걸까. 신참은 미궁에 빠졌다. 그때 한 단어가 의식의 지평선 너머 살포시 떠올랐다. 아는 단어다! 침을 삼키고 의자를 바짝 마이크 쪽으로 끌어당겼다. “왓 아 유 ‘싱킹’ 어바웃?”(무엇을 생각하시나요? What are you ‘thinking’ about?) 독일인도 ‘번데기 발음의 저주’에서 자유롭지 않다. 독일어에도 혀를 무는 영어식 ‘th’ 발음이 없기 때문이다.

영어가 필요한 독일인들은 미국으로 단기 어학연수를 떠나기도 한다. 건축가인 사라는 똥줄이 탔다. 미국 회사를 상대로 한 프레젠테이션이 한달 남았다. 플로리다 포트 라우라데일까지 하늘에 생돈 뿌려가며 날아왔는데 얽히는 건 다 독일인이다. 음식점에서 사라는 결연하게 선언했다. “이제부터 영어로만 말하자.” ‘나는 독일인이다’ 외에는 영어라면 무조건 아끼고 보는 사비나, 차마 싫다 말 못하고 입에 사탕 물었다. 목소리가 하도 커 말의 내용과 관계없이 경청하게 만드는 니콜은 호탕하게 좋다고 했다. 비~치(해변)와 비치(나쁜 년, 욕설)를 헷갈려 나쁜 년이 어딨는지 묻고 다니는 니콜은 함부르크 중소기업에서 비서로 일하고 있는 여자다. “나는… 햄버거… 먹는다.” “너는… 콜라… 마시냐.” 사라의 영어 몰입 선언 즉시 대화는 이 수준으로 떨어졌다. 30분이나 흘렀을까. 서로 네가 먼저 이 속 터지는 상황을 깨주길 바라는 눈치인데 니콜이 그게 뭐지 뭐지 하며 은근슬쩍 독일어를 끼워 넣었다. 사라와 사비나, 이 동아줄 놓칠세라 우르르 달라붙었다.

두 여자를 해방시켜준 ‘화통녀’ 니콜은 3형식 이상 문장을 말하려면 누군가 뇌를 해킹해 간다. 그런데 그는 미국에서 친구를 갈퀴로 긁었다. 소나기가 쏟아져 구멍가게에서 비를 긋는 사이에 거기서 마주친 60대한테 다음 여행 오면 꼭 놀러 오라는 말과 함께 연락처 얻어내는 식이다. “비에 홀딱 젖으셨네요. 하와이안 셔츠가 멋져요.” 파바로티 같은 풍채에서 우러난 귀청 뜯어내는 목소리로 말을 걸면 다들 뭐에 홀린 듯 주섬주섬 속을 꺼내 놨다. 상대가 속 얘기 좌판을 차리는 사이 니콜은 대체로 가식적인 미소를 날리며 독일어로 중얼거린다. “뭔 소리래.” 대체 이 여자의 비결은 뭘까?

영어, 솔직히 내가 니콜보다는 낫다. 그런데 나는 영어를 해야 할 때마다 바코드를 스캔당하는 기분이 든다. 영어가 계급, 교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육 수준을 모두 포괄해 보여주는 내 최종 가격표 같은 거다. 그 ‘저렴한 권장소비자가’가 드러날까 한없이 작아진다. 특히 원어민들 앞에선 바닥 보일세라 더 전전긍긍하게 된다. 사실 내가 그 사람들 말 배워 해주는 호의를 베푸는 중인데도 말이다. 관찰해본 결과, 사실 니콜의 괴력은 별게 아니었다. 요약하자면 ‘나는 니콜이야. 넌 누구니?’ 그게 다다. ‘난 네가 궁금해’ 그 순결한 질문 앞에서 너도나도 흔쾌히 자신을 까발리게 되는 거다. 그러려면 자신을 먼저 소개해야 하는데 니콜은 자신이 한 치도 부끄럽지 않다. 취미로 배우는 영어 따위가 저질이라고 니콜이라는 한 인간을 쫄게 만들 수는 없는 거다. 내게 영어는 오매불망 모셔야 할 ‘영어님’인 데 비해 니콜에게 영어는 자기가 선택해서 배워주는 외국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김소민 <한겨레> 편집부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김소민의 타향살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