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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5 20:18 수정 : 2013.12.26 11:30

사진 김소민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네가 몰라서 하는 소리야.” 루마니아인 록사나(사진)는 독일어가 원어민 수준이다. 영어, 스페인어까지 원 플러스 원으로 얹은 막강 구직자한테 독일에서 취직 걱정 없겠다 했더니 클럽에서 생긴 일을 들려준다. 코트 둘 곳 마땅치 않아 팔에 건 채 한창 춤추는데, 한 독일인이 그에게 말했다. “코트 구석에 놔. 아무도 안 훔쳐가. 여기 루마니아인 없어.” 구호단체에서 일하는 한 박사는 루마니아인한텐 한 달에 50만원만 쥐여 주면 뭐든 다 한다고 말해 록사나 속을 뒤집었다. 멱살 잡으려야 잡히는 것도 없는, 까무룩 안갯속 같은 편견에 록사나 같은 강타자도 다리가 휘청하는 거다.

1년여 독일에서 사는 동안 딱히 대놓고 시비 거는 사람 없었다. 지난 총선에 극우정당인 독일민족당은 1.3% 표를 얻고 찌그러졌다. 극우정당 지지율이 10%를 넘는 프랑스 등 다른 유럽 나라보다 양반인 거 안다. 그래도 불쑥불쑥 느껴진다. 주류 독일인들 뇌 속에 주인도 모르게 웅크리고 앉아 있을지 모를 ‘그놈’의 존재 말이다. 타자로 살다 보면 솜털까지 레이더로 바짝 선다.

장크트아우구스틴 시내는 흙탕물을 뿌려놓은 색깔이다. 오래된 고층 아파트가 껍질이 군데군데 벗겨진 채 피곤에 절어 서 있는 곳이다. 그곳 대형 자전거 매장에 갈 일이 있었는데 지하철역부터 30여분을 걸어야 했다. 74살 이웃 한스가 차로 데려다 주겠단다. 그럴 거 없다 해도 굳이 시동을 건다. “거기 외국인들이 살아. 위험해.” 아차. 한스는 그제야 움찔한다. 옆에 앉은 이 여자, 외국인인 거다. 그가 허둥지둥 덧붙인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나쁜 외국인.” 한스한테 극우정당 지지자냐 물으면 자기를 뭘로 아냐고 화낼 거다. 평생 사회민주당만 찍었다.

한번은 공원에 자전거를 세워두고 일주일을 안 찾아간 적이 있다. 잠금장치도 없었지만 믿는 구석이 있었다. 하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커 경적이 필요 없는 생짜 고물이었다. 그런데 그도 탐내는 이들이 있어 사라졌다. 47살 독일인 마르크는 대뜸 면박을 준다. “거기다 그렇게 오래 세워두면 어떻게 해. 거기 터키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김소민 독일 유학생

기자 귄터 발라프는 변장의 달인이었다. 터키 출신 외국인 노동자 알리로 변신해 겪은 일을 엮어 책 <가장 밑바닥>(간츠 운텐)을 1985년 냈다. 독일인이 꺼리는 공장 분진 청소에 동원돼 허파꽈리 터질 것 같은 고통을 찍소리 없이 감내해야 했던 건 그렇다 치자. 매순간이 강 같은 모욕이었다. 화장실엔 개와 터키인용이란 욕설이 휘갈겨져 있었다. 사장은 “너 여동생 없어? 터키 여자들 싸던데”라는 말을 침 뱉듯 뱉었다. 마르크와 한스 머릿속에 똬리 틀고 있는 그 ‘나쁜 외국인’들엔 라인강의 기적 가장 밑바닥을 받쳤던 노동자와 그 자녀들이 대거 포함돼 있는 거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무섭다. 지금까지 만난 독일인들 다 친절했어도, 마르크와 한스 같은 보통 사람들이 무심결에 던진 말들이 마음속 사이렌을 켜게 한다. 터키인, 루마니아인에게 상처 낼 수 있는 머릿속 ‘그놈’이라면 언제고 내 뒤통수도 후려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방인이니까.

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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