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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22 19:46 수정 : 2014.01.23 10:03

록밴드 ‘슈트롬 운트 바서’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록밴드 ‘슈트롬 운트 바서’의 리더 하인츠 라츠는 2012년 ‘윤리적 철인삼종’이라는 이상한 경기를 자기 혼자 만들어 뛰었다. 80군데 난민신청자 거주지를 돌았다. “이런 걸 보고 멈출 수 없었어.” 거기서 만난 감비아 사람 샘(29), 다게스탄 출신 누리(21), 아프가니스탄에서 온 후세인(19·사진 오른쪽) 등과 독일 전역을 돌며 1년 반 콘서트를 꾸렸다. 지난 12일 그들의 마지막에서 세번째 콘서트가 열린 본의 한 콘서트장, 밤 9시께부터 관객 300여명이 달떴다.

라츠가 본 건 30명당 달랑 하나뿐인 화장실, 취직·여행 모두 금지된 채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지난해 독일 난민신청자는 1997년 이후 최고치인 10만여명, 주간지 <슈테른>을 보면, 보통 이 중에 1.5% 정도만 난민 지위를 얻는다. 나머지 98.5%, 운 좋아야 발 묶인 무기징역 사는 셈이다.

‘당신이 감독에 갇힌다면’. 누리가 부른 노래 제목이다. 낱말을 무대에서 난사해버리는 그는 10년간 기프호른에 있는 난민신청자 거주지에 살았다. 전쟁 피해 12년 전 독일에 처음 도착한 날이 생생하단다. “안전하구나. 마음이 놓였어.” 누리 포함 5명의 가족에겐 25㎡(약 7.5평)의 방이 주어졌다. 또다른 공포의 시작이었다. “언제 경찰이 쳐들어와 추방시킬지 모르거든.” 학교에서 밥을 먹으려면 난민신청자용 쿠폰을 내야 했다. 애들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인턴 자리를 구했지만 노동허가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최근 그는 난데없이 한달 반짜리 체류허가를 받았다. “최고 기분 좋은 날이었지.”

비니를 쓰고 껄렁껄렁 복도를 오가던 후세인, 홀로 떠돌이 생활 4년째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태어났는데 탈레반 탓에 가족과 이란으로 도망쳤다. 이번엔 텃세에 시달렸다. 누군가 집에 불을 질렀다. 미래가 없겠다 싶어 짐 쌌다. 터키로, 그리스로 3년 떠돌았다. 노숙이야 인이 박였다. 힙합으로 허기만 달랬다. 1년 전 독일로 넘어와 지금 고등학교에 다닌다. 라츠는 그를 “90살보다 더 고생 많이 한 19살”이라고 소개했는데 말 붙여보니 헤벌쭉하다. “어떻게든 해봐야지. 예전에도 싸웠고 앞으로도 싸울 거야. 내 미래, 중요하잖아.”

감비아에서 온 샘의 다르부카는 북을 닮았는데 접신용인 거 같다. 내 옆에 있는 여자는 머리로 상상 속 드럼을 같이 치는 중인지 저러다 목이 빠지지 싶다. 처음 콘서트 시작할 때만 해도 관객이 5명이랬는데 이제는 떼로 몰린다. 그런데 라츠는 그만두겠단다. “지쳤어.”

그를 괴롭히는 건 독일 법이다. 난민신청자는 거주지를 떠날 수 없기 때문에 공연 때마다 공무원에게 허가받아야 했다. 기차역에 아프리카 출신 사람들을 보면 경찰이 불심검문하자 덤비니 공연에 늦기 일쑤였다.

다른 이유도 있다. 이미 끌어모을 관심 다 끌어모았다. 돈 벌 목적으로 다가오는 제작자도 생겼다. 돈 좋지 않나? “왜 저 사람들이 이런 취급 당해? 돈 없다고 이 나라 오지 말라는 거잖아. 이게 다 돈 때문이라고.”
김소민 독일 유학생

너무 딱딱하게 구는 거 아닌가? 라츠가 정신 판 또다른 궁리가 있다. “여자 난민신청자들 상황은 더 나쁜데 목소리 못 내. 큰 배를 빌릴 거야. 여성 난민신청자들하고 강 따라 돌며 공연할 거야.” 한국 신문에 나면 꼭 링크를 보내달란다. 후세인이며 샘 체류허가 받는 데 도움 되지 않겠느냐며 자기 이메일 주소를 꾸역꾸역 적어줬다.

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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