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통장 잔고, 심폐소생술이 시급했다. 아르바이트 구하려니 내 존재 전체가 방해물 같다. 나이는 불혹에 가까운데 독일어만 선택적으로 못 듣는 청각을 지녔다. 미녀도 아니고 넉살도 없는데 누가 취직시켜줄까. 그때 귀에서 종소리 나게 하는 광고를 발견했다. 문방구 재고 정리. 딱 하루. 한시간당 8유로(약 1만2000원). 아무 조건 없음. 바코드로 물건 찍으며 숫자만 세면 되는 거다. 그래도 영 문 열고 들어갈 자신 없어 독일어 잘되는 이란 친구를 꽸다. 그 친구가 일단 모든 말은 다 하고 나는 뒤에서 고개만 끄덕이는 걸로 합의 봤다. 불안하도록 순조로웠다. 주인 아줌마가 이란 친구랑 이야기하다 가끔 내 쪽을 쳐다보면 나는 과장된 몸짓으로 열광적으로 동의하고 있다는 표시를 보냈다. 아주머니가 곧 황홀한 서류를 건넸다. 거기 이름과 전화번호를 적고 난 뒤 일할 당일 이전에 한 번 더 보자고 한다. 8시간 일하면 금쪽같은 9만6000원이다. 동네방네 자랑했다. 소득의 환희를 너무 빨리 느껴버렸나. 일당 알현할 날을 기다리던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받자마자 독일어 폭격을 해댄다. 내 이름을 아는 거 보니 아는 사람인 거 같은데 뭐 하자는 걸까? 며칠 전 공짜 레스토랑 쿠폰 얻어 보겠다고 참여한 어느 교회 행사가 생각났다. 당첨된 거야? “교회라고요? 교회?” 아니다. 문방구다. 다 들켰다. 내 가열찬 동의의 고갯짓이 모두 할리우드 액션이란 거 말이다. 결국 그 아주머니는 이란 친구만 고용했다. 친구는 독일어 하나도 필요 없었다면서 너를 왜 잘랐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이상하게 눈물이 찔끔 났다. 파키스탄 친구가 그따위 문방구 잊어버리란다. 한 인력소개소를 알려줬다. 레스토랑 등에서 일할 사람을 수시로 파견하는 업체였다. 큰 파티 있을 때만 일하면 되는데 팁도 좋고 시간당 10유로(1만5000원) 준단다. 사장은 친절했다. 일하기 위해 마련해야 할 서류 리스트를 안긴다. 독일인들은 무슨 일이든 서류를 산처럼 쌓는 걸 좋아한다. 범죄 저지른 적 없다는 증명서, 사회보장번호에 건강관리국에서 감염 없다는 증명서를 받아 오란다. 약식이라도 검진 같은 과정이 있을 줄 알았다. 오전 8시30분, 본시 건강관리국 사무실 앞엔 15명이 게슴츠레 졸린 눈을 하고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명씩 들어가는데 받아 나오는 건 설문지 한 장이다. 열난 적 있나요? 고질병 있나요? 이런 질문에 스스로 예, 아니오 체크하는 거다. 네, 저는 최근 고열과 설사에 시달린다고 여기서 자백할 사람이 단 한명이라도 있을지 정말 묻고 싶었다. 그걸 적고 나니 돈 내란다. 25유로(3만7000원 정도)다. 이어 모두 캄캄한 방으로 보내더니 비디오를 튼다. 15분짜린데 내용은 손 잘 씻으라는 거다. 이 비디오에선 살균 광선이라도 나와 시청한 다음엔 감염이 없다는 게 증명되는 걸까? 내 옆에 앉은 한 청년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비싸고 가장 재미없는 비디오였다고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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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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