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3.19 19:29
수정 : 2014.03.20 10:13
|
사진 김소민 제공
|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내일 당장 떠나야 해. 할래 말래?” 파키스탄인 친구 조힙이 다짜고짜 물었다. 일주일 동안 스위스 한 도시에서 컴퓨터 엔지니어 행세를 하자는 거다. 나, 컴퓨터랑 평생 ‘밀당’하는 사이다. 아무 짓 안 했는데 컴퓨터 혼자 난데없이 토라져 창 닫기 일쑤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잠시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전원을 꺼주는 것뿐이다. “괜찮아. 내가 다 알려줄게.” 뭘 알려준다는 걸까? 조힙도 도긴개긴이다.
돈이 무섭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하면 일당 15만원이란다. 일에 대해 자세히 알면 뭐하겠나. 괴로워질 뿐이다. 그냥 가방 쌌다. 그렇게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친구들과 나, 네명으로 이뤄진 오합지졸 국제 사기단이 급조됐다. 내가 믿을 것이라곤 가방 안 컵라면뿐이었다. 적어도 서러운 일 생기면 속 풀 국물은 있는 거다.
스위스 회사 건물은 으리으리했다. 이 회사, 최근 모든 컴퓨터에 새 프로그램을 깔았다. 프로그램 판 쪽에선 대어를 문 셈이니 고객의 귀라도 파줄 태세다. 그러자니 진짜 문제를 해결하는 엔지니어 외에 이 회사 고객들 사소한 불편함에도 현장에서 바로 응대할 손발이 필요한데 그 일에 딱히 비싼 기술자 필요 없으니 아웃소싱을 준 거다. 아웃소싱이 아웃소싱을 낳고 아웃소싱이 아웃소싱을 낳으니 그 마지막 떡 쥔 자가 파키스탄인 무함마드다. 무함마드가 누군지 조힙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소셜네트워크서비스 링크트인에 올린 조힙의 프로필을 보고 일을 제안했다는 거다.
이 아웃소싱, 새끼를 너무 쳤다. 첫날 스위스 회사 프런트 데스크 앞에서 자기가 우겨 우리 리더가 된 조힙의 지푸라기 권위는 모두 떠내려가 버렸다. 만날 사람 이름 플로리안만 알고 성을 몰랐다. 아웃소싱의 긴 족보를 거치는 동안 플로리안의 성이 증발해 버렸다. 프런트 데스크 앞에서 우리 넷은 플로리안만 읊조렸는데 그 집단주문이 효력이 있었는지 진짜 플로리안이 나타났다. 한 사무실에서 멀뚱멀뚱 다른 담당자를 기다리는 사이 유리문 밖으로 회사원들이 지나가자 조힙은 송아지 같은 눈을 껌벅이며 속삭였다. “이야, 저 사람들 진짜 엔지니어 같다.”
사실 우리가 엔지니어일 필요는 없었다. 초록색 조끼를 입고 회사 복도를 어슬렁거리는 게 일이었다. 사운드 디폴트 따위 간단한 문제는 해결하고 어려운 건 컨트롤 센터에 상주하는 진짜 기술자들에게 보내면 됐다. 첫날은 컴퓨터 까막눈 들킬까 누가 부르기만 해도 경기 날 지경이었다. 한 이틀 지나니 배짱이 생겼다. 영문 모를 질문 해대면 심각한 표정으로 싱크로나이징이 어쩌니 내 입에서 나왔다고 믿을 수 없는 가증스러운 단어를 던진 뒤 문제가 심각하다며 컨트롤 센터로 보냈다.
가끔 하릴없이 돌아다니다 정식 직원들을 보면 처량해지기도 했다. 나야 일주일살이니까. “우리 스위스인은 항상 생각하고 행동하지.” 말끝마다 ‘우리 스위스’를 붙여대며 은근히 우리를 깔보는 플로리안에게 속 시원한 대거리 못 한 게 변비가 됐다.
그래도 우리에겐 해질녘이 있었다. 일 마친 뒤, 회사 근처 호숫가에 앉아 네마리 닭처럼 마지막 햇살을 쪼개 가졌다. 자기 발 앞으로 백조가 지나가자 덩치만 큰 어린이 친구 조힙은 빨리 사진을 찍으라며 호들갑을 떨었다. 적어도 그런 오후의 축복은 국제 사기단에도 아낌이 없었다.
김소민 독일 유학생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