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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02 19:42 수정 : 2014.04.03 09:56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그와 눈이 마주쳤다. 강렬한 첫 눈길 주고받았을 때 예감했다. 스쳐 지나갈 수도 있었다. 입국장 직전이었다. 시선이 집요했다. 결국 불러 세웠다. “가방 다 열어보세요.” 그는 사건 현장에 출동한 형사처럼 증거 하나라도 더 잡겠다는 듯 비닐장갑을 꼈다.

그날은 시작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출발지인 이스탄불 공항에서부터였다. 독일로 돌아오는 항공편 짐 부치려 줄 서 있는데 공항 직원이 다가와 여권 내놓으란다. 내 앞에 선 일행, 스페인 친구한테는 아무런 요구가 없다. 쥐여주니 여기저기 훑어보고 10여분 뒤 돌려줬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거짓 미소 짓고 있는데 스페인 친구, 고춧가루 뿌린다. “네가 유럽연합 사람 아니라서 그런가봐.” 심사가 뒤틀렸다. 하여간 외모, 국적 따위에 따른 온갖 편견을 직감이라 우기며 의심해도 속 시원히 대거리도 못 하는 어처구니없는 동네가 내겐 공항이다.

“왜 다른 사람은 다 보내면서 나만 잡아요? 내가 수상해 보여요?” 분노라는 건 소화가 안 되는 물질인가 보다. 잊은 줄 알았던 오전의 불쾌가 위장에 남아 있다 프랑크푸르트 단속 청년을 만나 급속 발효, 나는 입으로 거품을 뿜어내고 있었다. 청년은 가차 없이 답했다. “그럴지도.”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내 가방을 열어 좌판을 벌이겠다는 거다.

“이걸 꼭 열어야겠어요?” 가만히 있을걸, 애원, 협박 반반 섞인 말을 날려 청년의 검색 의욕을 북돋웠던 까닭은 ‘빤쓰’ 때문이다. 그래 이 청국장 같은 속옷은 팬티라는 말이 어찌 어울리지 않는다. 일주일 동안 한 번도 빨지 않아 화석이 돼 가고 있는 헌 빤쓰들이 여행가방 맨 위에 마구 발굴된 상태로 널브러져 있다는 걸 가방 싼 나는 알고 있었다. 가방을 여는 순간 스프링처럼 튕겨 나올지도 모를 일이었다.

우리 둘은 시선을 피했다. 그도 아마 내 경고를 듣지 않은 걸 후회했을 거다. 비닐장갑에 감사했을지도 모르겠다. 이리저리 들추더니 5분도 안 돼 다시 뚜껑을 덮었다. 무덤덤하게 보이려 했는데 내 피부는 내부고발자,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안녕이라는 말도 없이 잽싸게 공항을 빠져나왔다. 눈물이 줄줄 났다. ‘왜 다른 독일인들 다 두고 나만… 이건 인종차별이야.’ 분했다.

마중 나온 친구 생각은 달랐다. 독일인인 그의 논리는 이랬다. 첫째, 검색청년의 직업은 특이한 요소를 잡아내 위험 여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둘째, 그 비행기 승객 대부분이 독일인 여행객이었다. 셋째, 한국인인데 이스탄불에서 지내다 독일로 오는 너의 경로는 당시 다른 탑승객들에 비해 ‘비일상적’으로 보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니 청년은 자기 일을 한 것뿐, 인종차별이라 보긴 어렵다.

“네가 독일인이니까 그렇게 쉽게 말하는 거지.” 발광하면서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이 상황에 인종차별이란 틀을 자동적으로 갖다 댄 까닭은 내 안의 자격지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내 인종에 대해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면 나야말로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닐까? 친구의 다음 말을 듣고 나니, 사실 가해자는 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는 이미 그에게 잔인한 복수를 했어. 그 친구, 네 더러운 속옷을 봐야 했잖아.”

김소민 독일 유학생

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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