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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4.16 19:33 수정 : 2014.04.16 19:33

사진 김소민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같은 과에 20개국 출신 29명이 모여 있으니, 하루걸러 싸움이다. 장난이 몰고 올 욕설 태풍, 그날 저녁 이란계 독일인 무함마드와 낄낄거릴 때만 해도 까맣게 몰랐다. 모두 같이 간 뮌헨 여행 마지막 밤, 그냥 자기 서운해 악질 장난 꾸밀 때는 즐겁기만 했다.

장난은 7살 눈높이가 제맛이다. 새벽 2시께 프런트 데스크인 척 학생들 방으로 전화해 교수가 세미나 일로 급하게 부르니 304호로 당장 가보라고 협박, 304호에서 ‘웍’ 놀라게 하자는 것이었다. 무함마드는 존경스러웠다. 코만 막았는데 목소리가 바로 프런트 데스크다. 강철 심장 인도네시아 친구 두명만 교수건 뭐건 말도 안 되는 요구엔 응할 수 없다며 계속 자버렸고 나머지는 슬리퍼만 발에 낀 채 헐레벌떡 희생양이 됐다. 방글라데시인 압둘은 긴 천을 치마처럼 둘러 입는 옷을 대충 걸치고 왔다. 떼굴떼굴 굴렀다. 잠이 덜 깬 몽골 친구는 우릴 보고도 사태 파악 못 한 채, 교수 방이 어디냐 물었다. 나만 당할쏘냐. 한명씩 희생자가 늘어가며 304호는 몸만 늙은 국제 어린이 조직의 은밀한 아지트가 돼가고 있었다.

우크라이나 친구 아나도 골려줄까, 투표가 붙었다. 성질 활화산이니 잘못했다간 우리 모두 유황불에 튀김이 되는 수가 있었다. 역시 ‘너도 당해라’가 승리했다. 무함마드는 한술 더 떠 아나에게 사진을 찍으니 셔츠까지 다려 입고 오라고 했다. 아나는 잠결에 셔츠를 다리다 문득 깨닫고 결심했다. ‘이것들, 요절을 낸다.’ 먼저 진짜 프런트 데스크에 전화해 한밤의 홍두깨질을 해버렸다. 그 밤 순결한 데스크 청년은 주리를 틀렸는지도 모르겠다. 어찌 알았는지 내 페이스북 메시지는 아나가 보낸 욕설로 배 터져 버렸다. 정화해 말하자면 ‘너 때문에 밤잠 다 설쳤고 네가 무슨 권리로 날 웃음거리로 만들려 하느냐’는 거였다. 너한테만 장난친 거 아니다, 미안하다, 여러 번 해도 다 반사했다. 욕설의 강도가 표도르 발차기 급이다. 그때쯤 내 맘속에서도 분노가 몰아쳤다.

진짜 황당한 건 아나보다 내 뇌였다. 내 이성은 장식인가 보다. 이성은 점잖게 말한다. ‘아나는 네가 아는 단 한명의 우크라이나인인데 그와 일이 틀어졌다고 우크라이나 전체에 꼬리표 붙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짓거리다. 한국 다 뒤져도 나랑 똑같은 사람 없지 않으냐.’ 지당하다. 그럼에도 무력하다.

월급통장 돈 빠져나가는 눈부신 속도로 편견은 자란다. 자라, 솥뚜껑, 압력밥솥 안 가리고 막 번진다. 편견은 날쌔다. 이성이 엉거주춤 일어설 때쯤이면 벌써 상황 종료되기 일쑤다. 하루 전 산 옷 바꾸러 갔는데 사장이 우크라이나 억양으로 안 된다 하면 ‘하여간 이 사람들은 다 공격적이고 불친절하지’ 이렇게 마음이 돌아가는 거다. 처음 만난 사람이 우크라이나 출신이라고 하면 난데없이 경계태세다. 어이없게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옆에 있다는 이유로 은근슬쩍 내 마음속에서 한 꾸러미에 담기기도 했다. 친구는 내 고민을 듣다 너 이러다 인종주의자 되겠다며 꼬집었다.

나는 대체로 선량하고 편견에 쉽게 휩쓸릴 만큼 그리 미련하지는 않다 믿었건만, 나는 그렇게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나와 내가 혐오하는 인간 사이의 차이라는 게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눈 깜짝할 새 넘나들 두께일 뿐이었다. 내가 원하지 않는데도 내 마음이 그리 움직이는 걸 무능하게 쳐다볼 때면 묻게 된다. 나라는 너는 대체 누구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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