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4.06.25 19:04
수정 : 2014.06.26 1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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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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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딱 딱 딱’ 닫힌 문 새로 신호음이 들렸다. 71살 아버지가 인터넷 바둑 두는 소리다. 존재 증명하는 바이털 사인이다. 말 없는 아버지가 세상 밖으로 보내는 모스 부호일 수도 있다. 한국에 살 때 가족이 모이면 으레 엄마와 여동생, 나는 그 소리를 배경으로 수박 따위를 깨 먹으며 드라마를 봤다. 아버지는 항상 문 뒤에 있었다. 그와 나는 평생 서로 해독할 수 없는 암호를 날리다 토라져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침묵 공습 경보가 울렸다. 독일 남편의 가족과 한국 부모님이 독일에서 처음 만나는 날 아침이다. 모두 핵 협상을 앞둔 정상처럼 진지했다. 과묵한 아버지는 긴장해 책에서 읽은 독일식 인사법을 두번 세번 읊었다. “오른쪽 뺨, 왼쪽 뺨. 잘못하다가는 뽀뽀하는 수가 있다.” 두 가족은 말이 안 통하고, 말 통하는 아버지와 나 사이에 긴말이 오간 건 일사후퇴 때가 마지막이었나.
독일 시어머니는 케이크 세 종류를 구웠다. 케이크를 비무장 지대로 두고 양쪽 진영 가식 미소로 간을 보는 사이 나는 입술을 물어뜯었다. 그때 아버지 입이 바들거렸다. 인디아나 존스가 찾는 천년보물의 방 빗장이 풀리듯 그 끝 모를 듯 깊었던 동굴의 문이 비끌리고 있었다. “구텐타크. 이히 프로이에 미히(Ich freue mich. 만나서 반갑다).” 경상도식 독일어였다. 구립도서관에서 독일어 팠다고 했다. 이어 넉살좋은 웃음이 이어졌다. 마당발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였다. “어머, 독일어 하시네.” 시어머니 말 둑 터졌다. 세 케이크 레시피로 대하 서사시 쓸 모양이다. 아버지는 추임새 넣었다. “레커, 레커, 분더바.”(맛있네 맛있네 끝내주네) 흥이 난 시어머니, 내친김에 마당으로 진출했다. 이 만남이 판소리 완창만큼 길어질 것 같은 예감이 몰려왔다. 그날 그 집 마당엔 웬 꽃이 그리도 흐드러졌던 걸까. 시어머니는 한송이 한송이 부여잡고 설명했다. 시아버지가 계란주를 내왔다. 한창 분위기 오르자 만국 공통 화젯거리인 화장실 유머 주고받는지 시아버지는 계속 “피피, 피피”(오줌, 오줌) 거렸다. 아는지 모르는지 아버지는 조건반사처럼 웃어 젖히며 한국말로 내게 계속 물었다. “언제 가냐. 이제 가자. 가면 안 되나.” 그날 시어머니는 내가 상상도 못했던 말을 했다. “아버지가 참 명랑한 분이네.”
독일에 머무는 2주간 아버지는 동네 탐험 나갔다 길을 잃어버렸고, 수챗구멍이 뚫리지 않은 건식 화장실을 물바다로 만들었고, 커피숍에서 카푸치노를 스스로 시키고 의기양양해했으며 50년 만에 자전거를 탔다가 입술이 파래져 돌아왔다. 7살 손자와 축구를 했고 처음으로 나에게 산에서 조난당할 뻔했던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리고 내 결혼식 날, 백발노인이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뺀 채 엉거주춤 말춤을 췄다. 노래하는 모습도 내게 보인 적 없었던 사람, 아버지였다. 이판사판 형형색색 조명 돌아가는 춤판, 나는 얼렁뚱땅 그 손을 한번 잡았다 놓았다. 너무 잘 알아 물어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이 사람은 누구였을까. ‘당신은 이런 사람’이란 시선의 감옥에서 풀려난 그는 내가 처음 보는 소년이 돼 있었다.
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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