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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7.16 19:09 수정 : 2014.07.17 14:31

사진 김소민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결정해주는 남자’ 70대 밍크가 이사 오면서 10가구 사는 연립주택의 평화는 깨졌다. 발화점은 세탁실이었다. 세탁기를 각자 집에 놓지 않고 지하에 모아두고 빨래하는데 거기 걸린 빨랫줄이 도화선이었다. 선전포고는 이메일로 왔다.

“이웃 여러분, 환기 불가 세탁실 내 습기 함유한 천 등(이하 빨래) 건조 시 건축자재에 악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지 않을 수 없는바, 건조 지탱물(이하 빨랫줄)을 상기 공간에서 조속히 철거해 주시기를 바라 마지않습니다. 여러분의 밍크.” 빨랫줄을 걷어내지 않으면 검찰에서 압수수색을 나올 것 같았다.

홀거가 발끈했다. 50대 독거 직장남으로 종갓집 맏며느리를 방불케 하는 살림의 여왕, 빨랫줄의 명예를 제 것처럼 아끼는 남자다. “첫째, 10년 이상 빨래를 말려왔으나 이로 인해 건물에 이상이 발견된 적 없습니다. 둘째, 세탁실 문 앞에 분명 ‘세탁 및 건조실’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셋째, 건조는 주민회의에서 결정된 것으로 밍크 혼자 바꿀 수는 없습니다.”

참조에 참조를 거듭하는 이메일 지구전의 시작이었다. 첫번째 쟁점은 ‘건조’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졌다. 밍크씨 “하나, 여기서 건조란 전력을 통한 건조, 즉 건조기로 하는 건조에 한하는 것임”을 밝혔는데 건조를 계속 반복하며 글로 말을 더듬는 것을 보니 혈압 상승 중이다. 두번째 쟁점, 민주적 절차였다. “하나. 주민회의에서 결정됐더라도 구조물 안전을 위한 법률이 상위법임을 확신하기에 인정할 수 없다.” 쉬운 말 어렵게 해 정신을 사납게 하려는 밍크의 작전, 우사인 볼트급 스피드를 지닌 3살짜리 아들 때문에 자신도 스프린터가 돼버린 직장맘 크리스티아나에게 먹혔다. “귀가 코에 붙어 있는지도 모를 지경이니 알아서들 해주세요.”

스크롤 압박 심한 중심논쟁에 덧붙여 홀거 쪽 이웃끼리 돌려보는 전우애 충전 번외편 메일까지 우편함을 수시로 폭격해 대더니 휴전은 의외의 것으로부터 왔다. 빨래 건조대. 밍크는 빨랫줄만 걷어낸다면 명분은 찾은 것으로 봤나 보다. 홀거 쪽에서는 빨래를 거기서 말리게만 한다면 자존심은 지킨 것으로 해석하기로 한 것 같다.

한동안 불안한 평화가 유지됐다. 갈등의 핵 빨랫줄은 사라졌고 빨래 건조대만 꾸벅꾸벅 졸며 비무장지대를 지켰다. 하나 아슬아슬한 균형은 복병으로 무너졌다. 그간 이메일이 너무 길어 통 읽지 않았던 발레리가 끼어든 거다. “대체 빨랫줄에 말리는 것과 빨래 건조대에 말리는 것이 건축자재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해 무슨 차이가 있나.” 그렇게 섬광처럼 깨달음을 얻은 빨랫줄파들이 다시 암약하게 됐다.

이 전쟁으로 바뀐 것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빨래만 지난날의 증인처럼 묵묵히 거기 있을 뿐이다. 다만 밍크는 그 후 과격한 제안을 쏟아내 이슈의 중심 자리를 지켰다. 발코니에서 꽃에 물을 줄 때 아래층 사람 머리 위로 떨어지지 않도록 확인할 의무, 복도에 유모차 주차 금지, 아이들 소음 유발 구역은 놀이터로 한정 등이 담긴 새 규칙안 제안했다가 기각당했다. 주민들은 밍크에게 이런 꼬리표를 붙였다. ‘극단의 독일인.’

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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