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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9.10 20:23 수정 : 2014.09.11 11:43

사진 김소민 제공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그것은 한낮의 심문이었다. 심문하는 사람은 나, 당하는 자도 나였으니 도망갈 구멍이 없었다. 한식당에서 3시간 시험 아르바이트를 하고 온 다음날이었다. 오늘까지 주인에게 일할지 말지 알려주겠다 하고 주방을 탈출한 게 어젯밤 10시께였다. 오늘 종일 주인 전화번호 찍은 핸드폰 들고 통화버튼 못 누른 채 머리카락을 잡아 뽑고 앉았다. 나는 대체 왜 통화버튼을 못 누르고 있는지 나를 채근하는 중이었다. 이실직고하지 않으면 제 손으로 자신을 대머리로 만드는 형벌을 내릴 태세다.

식당은 배 아프게 잘됐다. 독일인들이 진짜 고기 맛을 알게 됐나 보다. 소불고기, 양념돼지고기를 식탁 중간에 놓은 철판에 구워 먹는 그 맛, 할 말 없을 때 고기 뒤집으며 시간 때우는 그 기막힌 맛을 본 거다. 수요일 오후인데도 빈자리가 없었다.

촛불 살랑거리는 식탁을 지나 주방 문을 여니 새파란 형광등이 눈을 찔렀다. 똥 누러 가면 범죄인 형국이었다. 검은 면티 맞춰 입은 특공대 4명, 둘은 중동계였고 둘은 한국인이었는데 딱 봐도 백전노장이었다. 재빠르면서도 여유 있는 기찬 손놀림이 성룡의 취권같이 절묘했다. 그날 내 사수는 30대 초반 한국 여자, 안경을 코끝에 걸친 채 두 사람 지나면 어깨가 부딪치는 복도형 주방을 유유자적 유영했다. 스스로 벌어 유학 생활 10년이란 그가 만두를 튀기면서, 전을 부치면서, 반찬을 담으면서, 옆 사람과 농을 치면서, 그 옆 사람이 만든 캘리포니아롤을 남들 모르게 슬쩍 받아 게 눈 감추듯 입에서 녹여내는 걸 보고 있자니 그에게 복속되고 싶어졌다.

내가 할 일은 나에게 꽤 맞아 보였다. 요리는 언감생심, 반찬을 접시에 담는 것이었다. 그런데 복병이 있었다. 메뉴마다 딸려 나가는 반찬이 다 달랐고 가짓수도 많았다. “메뉴 1에는 어떤 반찬 나가죠?” 나를 맡은 여자 성룡이 몇번 일러준 뒤 물었는데 카리스마에 짓눌려서인지 자꾸 버벅거렸다. 그렇게 힐끔힐끔 전자레인지 귀퉁이에서 어렴풋이 반짝이는 희망의 별, 시계를 훔쳐보며 3시간 때웠다.

그리고 결정의 순간이 왔다. 추궁당하는 내가 주인에게 일하겠다 말하지 못하는 이유를 둘러댔다. ‘한 시간에 7유로는 너무해. 지금 법정 최저임금이 8유로가 넘는데 부당하잖아.’ 추궁하는 내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비웃었다. ‘돈도 벌고 일도 배우고 사람도 만나고 좋잖아. 일이 간단하잖아. 인도네시아 친구도 다른 레스토랑에서 7유로 받고 일하잖아! 너 그게 진짜 이유 아닌 거 다 알아!’ 추궁하는 내가 맞다. 나는 자존심 상했던 거다. 남들이 우습게 볼까 무서웠다.

진실을 쥔, 추궁하는 내가 이겼다. 통화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너무 늦게 깨달았다. 주인이 싫단다. 돌이켜보면, 내가 담은 김치는 포기 반대 방향으로 벌러덩 뒤집어져 하늘로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여자 성룡이 김치 포기가 굽은 방향을 고려해야 소담하게 담을 수 있다며 시범을 보였더랬다.

고민이 민망하게 순식간에 잘렸는데 이상했다. 멍 때리고 있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이렇게 속으로 중얼거렸다. 메뉴 1, 콩나물, 감자볶음, 미역나물, 김치. 메뉴 2, 콩나물, 감자볶음, 여기서 주의, 미역나물 빠지고…. 그날 바로 일하겠다 해 주인을 옭아맸어야 했는데, 자존심아 이제 그만 떠나주라, 나 좀 살자.

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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