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5.01.21 20:32 수정 : 2015.01.22 13:24

<한겨레> 자료사진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아까는 그렇게 하는 게 아니었어.” 친구들과 한국 식당에서 밥 먹고 돌아오는 길 차 안에서 독일인 남편이 핀잔을 줬다. 한국 음식 먹어본 적 없다던 스테파니(68)와 보도(72)랑 불고기를 구워 먹었다. 반찬 무한리필까지 둘 다 좋아라 했는데 지갑을 열자 어색한 순간이 튀어나왔다. 내가 안 내면서도 내려고 했다는 인상을 주려면 초속 몇 센티미터로 지갑을 열어야 할까 그 절묘한 타이밍을 찾다 불혹이 된 나다. 그 끊임없는 수련의 결과 내 머릿속에는 정교한 고차방정식이 있다. 상대의 나이, 친한 정도, 누가 낼까 눈치 보는 순간의 심리적 압박 정도 따위가 변수인데 그날은 우리가 낸다는 답이 나왔다. 둘 다 부모님 나이인데다 한국 식당에 왔으니 대접을 해야 할 것 같았다. 보도가 꺼낸 50유로를 돌려주며 “아니야, 주차비 내줘요”라고 말하니 나는 친절하고야 말았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그런데 남편은 그 순간을 꼬투리 잡았다.

이 남자, 50유로 아까워 생트집인 줄 알았는데 나름 논리가 있었다. 그렇게 다 내버리면 상대가 거기에 걸맞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 부담을 느낀다는 거다. 특별한 날 ‘내가 초대할게’라고 말한 뒤에야 괜찮지만 그런 말 없이 같이 온 이런 경우엔 되레 마음을 불편하게 한단다. 게다가 내가 너보다 사정이 낫잖아 식으로 잘난 척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거다. 그날 밥값을 내고도 묘한 죄책감 덤터기를 썼다.

‘밥값 안 내고도 친절 인상 남기기’ 쇼에 발등 찍힌 적도 있다. 뮌헨에 사는 가구공장 사장 사비나(45)는 포르셰를 끌고 나타났다. 그와 저녁 먹은 바이에른식 식당은 감자와 밀가루 반죽을 경단처럼 만 것에 소스 좀 뿌리고 한 사람당 25유로를 강탈하겠다고 덤볐다. 여기는 사비나 구역, 나는 차로 4시간을 달려온 손님, 나는 반백수 그는 사장, 우린 100년에 한번 볼 사이, 이런저런 변수들을 넣고 나니 밥값 낼 생각은 추호도 없어졌다. 근데 또 습관 나온다. “내가 낼게.” 나는 이 순간을 이후 석 달간 줄기차게 후회했다. “어 정말? 왜?” 사비나가 물었는데 이제 무르기도 어렵게 됐다. “내가 초대하고 싶어서.” 뭔가 낌새가 안 좋다. 사비나는 상냥하게 미소를 띠며 말했다. “고마워.” 이건 내가 기대했던 대답이 아니다. 자전거도 없는 나는 포르셰 주인 몫까지 금쪽 같은 50유로를 토해냈다. 고백한다. 나는 그 순간 사비나한테 서운했다.

여기는 빈말과 행간 읽기, 우회적인 거절 따위는 약에 쓰려고도 없는 독일인데 자꾸 까먹는다. 여기서 맞은 ‘나인’(아니요) 소나기, 이제 이골이 날 때도 됐는데 상대가 대놓고 ‘나인’ 하면 아직도 순식간에 불쾌한 마음이 올라온다. 가게 직원이 다짜고짜 첫머리부터 힘줘 ‘나인’이라 하면 ‘왜 이리 불친절해’로 마음이 직행한다. 좀 에둘러 말해주면 안 되나. 독일인 친구는 손님이 시간 낭비 하지 않게 바로 명확하게 알려주는 게 왜 기분 나쁘냐고 내게 되물었다.

내 머릿속엔 언제 들여놨는지 모를 자동 장치들이 꽤 많다. 어떤 것은 기억이 장착됐고 어떤 것은 내가 익숙한 문화로 제작됐다. 이것들이 내가 보는 세상을 대체로 결정한다. 어찌나 성능이 좋은지 주인장도 모르는 사이 순식간에 가동된다. 파생상품은 오해의 찌꺼기일 때가 많다. 잠깐 멈춤 버튼이 필요한데 설치가 힘들다. 너는 내가 아니지 생각할 시간 말이다.

김소민 독일 유학생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 김소민의 타향살이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