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5.05.13 19:07
수정 : 2015.05.14 11:00
[매거진 esc] 김소민의 타향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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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친구 집 앞에 몰래 장식한 자작나무를 세우는 독일 라인란트의 마이바움 풍습. 사진 김소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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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살 토마스는 사랑에 빠졌다. 동네방네 다 아는 사실이다. 페이스북은 “나의 여신, 석양은 네 미모를 빛내는 배경화면” 따위 남세스러울 말들로 도배돼 있다. 그리고 4월30일, 1년4개월째 진행중인 그 사랑을 증명할 날이다. 5월1일 아침까지 장식한 자작나무를 여자친구 집 앞에 몰래 세우는 게 드문드문 남은 이곳 라인란트 풍습(사진)이다.
하트모양 판에 이름을 그려 넣고 가지마다 리본으로 장식한다. 나무 통은 지름 15㎝ 정도로 가늘어도 길이가 4m 이상씩 뻗어 있으니 장정 둘이 필요하다. 가랑비가 부슬거리는 날, 그가 운전을 맡은 이웃 베른트와 시내에서 10㎞ 떨어진 코튼산 마이바움 장터로 향한 까닭이다.
자동차 와이퍼가 무력하게 빗방울을 밀어냈다. 친구 하인스와 작전 짜기 한창이다. “하인스, 네 여자친구 집 근처에 우리 나무를 숨겨둘 거잖아. 그런데 걔가 그걸 발견하면 내 여친한테 다 까바칠 거란 말이야. 내가 나무를 숨기는 동안 네 여친을 꾀어내 시간을 보내라고.” 통화중인 청춘은 진지한데 오십 줄에 앉은 운전사 베른트는 실실거리고 있다.
동산 중턱 비포장도로에 50여대가 벌써 빼도 박도 못하게 줄 서 있다. 토마스는 차에서 내려 숲 속 판매 장소로 걸어 들어갔다. 진흙이 들러붙어 걸을 때마다 묵직해졌다. 토마스가 거기서 거기인 나무를 30여분간 재고 따지다 4m짜리를 고르자 그 자리에서 잘라 준다. 15유로다. 토마스야 차에 실었지만 여의치 않은 청춘들은 빗속에 나무를 어깨에 지고 산을 내려갔다.
한스(78)는 53년 전에 3층 높이 자작나무를 직접 벴다. 아버지랑 앞뒤로 잡고 자전거 두 대로 운반해 동네 처녀 크리스텔(76) 집 앞에 밤새 세웠다. 둘은 이후 애 둘 낳고 손주 넷을 봤다. 53년 뒤 5월의 어느 날 이 부부는 정원에 나란히 앉아 볕을 쬈다. 잠들까 말까 노곤한 찰나 초인종이 울렸다. 한스가 엉거주춤 일어났다. 세월은 그에게 임신부 배를 남겼다. 크리스텔은 눈을 감은 채 다그쳤다. “아 거참, 빨리빨리 좀 움직여요. 늙은이처럼 굼뜨게.” 한스는 들리지 않을 만큼만 구시렁거렸다. 그 옛날 마이바움을 받은 크리스텔은 한스에게 감격의 키스를 했다지.
카리나(48)는 15살 때 첫 마이바움을 받았다. 남자친구가 전날 집 앞에 텐트를 쳤다. 그 시골 동네에선 다른 경쟁자가 와 슬쩍 나무를 치워버리는 탓에 망보기 일쑤였단다. 셋씩 받아 골라잡았던 동네 친구도 있었지만 카리나는 그 단 하나의 마이바움이면 족했다. 그때 그 정성이던 남자친구와는 1년도 안 돼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유로 헤어졌다.
클라우디아(46)는 첫 마이바움에 심드렁했다. 마음에 안 드는 친구인데 클라우디아 동생까지 구워삶아 둘이 꾸역꾸역 마이바움을 세웠다. 17살이던 클라우디아가 딱 잘라 거절하자 그 청년 눈자위가 붉어졌더랬다. 안쓰러워 나무는 한달 세워주는 걸로 달랬다. 두번째 마이바움은 10년 산 남편에게 받았다. 그리고 둘은 갈라섰다.
한달쯤 세워둔 마이바움은 버려진 서낭당 같다. 밤에 보면 섬뜩하다. 자다 코골이로 귀청 뜯어내는 남편 보고 놀라는 느낌과 비슷하다. 이 나무가 그때 그 나무인가, 이 남자가 그때 그 남자인가. 그래도 내년 4월30일이 되면 달뜬 청년들은 나무 짐을 질 거다. 마이바움이야 결국엔 쓰레기통행이지만, 오월의 기억은 남으니까.
김소민 독일 유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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